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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1. 2021

더 낫게 실패하기

... 하고 싶은 공부





그러나 공자나 그의 제자들은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아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력에 의존하여 천하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말했듯이, 그들은 승리하기보다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논어>는 과거시험이라는 공무원 고시의 필수과목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한때 운동권 서적이었던 책이 본격적인 고시 수험서가 된 것이다. 실패자의 텍스트가 기득권의 텍스트가 된 것이다.
- 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성공하고 실패하고가 문제가 아니야.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죽는 게 제일 억울할 거야. 그러니 해보고 싶은 건 일단 해봐야 해."


어쩌면 딸이 국내 대학을 간다고 했어도 우리 부부는 긴장감이 없을지도 모른다. 가족 모두가 딸의 시험에 총력을 기울이는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힘이 응집된 자식의 능력은 오롯이 자신의 능력일까 의심한다. 나는 수능방송요원으로 딸은 수험생으로 각각 자기 할 일 하러 간다. 딸은 성공하기 위해 이 길에 선 것이 아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딸의 '조금 더 낫게 실패하기'를 지지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렇게 용감하게 서술할 수 있다. 내 기록 속에서 딸의 홀로서기 타임테이블을 찾아 정리해 본다.

기록마다 "딸아 잘 살고 있어."를 반복한다. 그 말은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하는 불안을 밀어내려는 자기최면이기도 하다.




S#1. 대한민국 수능일 - 2021.11.18.목



"난 이렇게 긴장감 없는 고3 수험생 학부모가 될 줄 몰랐어."


아내가 운전하는 차안에서 농담을 던진다. 이 말은 딸에 대한 비난도 수험생 부모의 자기책망도 아니다. 수능시험 방송요원 일을 수행하기 위해 새벽별을 보고 출근한다. 고3 수험생 학부모인데 학교에 수능일 하러 나와야해서 많이 신경 쓰이시겠어요,하는 주변 선생님들의 말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다. 아, 뭐, 그렇죠, 하하, 하고 얼버무린다. 나를 우리학교 교문에 내려주고 아내는 딸을 수능시험장에 데려다주려 다시 총총히 집으로 간다. 가방 메고 학교 시험장으로 들어서는 내가 수험생 같다. 딸은 어제 수험표를 받으러 학교에 들르기 전 운전면허시험 합격소식을 알려 왔다. 아내가 말했다.


"나는 쪼꼬미 우리 딸이 운전하는 큰 트럭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딸은 여섯 살 즈음부터 자기가 돈을 벌면 아빠에게 캠핑카를 사주겠다고 호언했다. 캠핑카를 운전하려면 1종 면허증을 따야한다고 했더니 딸은, 그래? 그럼 그거하지 뭐, 했다. 그러고는 한방에 붙어버리겠다며 특유의 허풍을 떨었다. 어디서 저런 게 나왔는지, 부부는 어이가 없어 그저 웃는다. 이미 캠핑카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S#2. 낯선 성적표 - 2021.8.11.수


기운이 없어 거실 바닥에 늘어졌다. 딸이 밥을 차려 준다. 대충 한 그릇 때우고 다시 드러눕는다. 딸이 밝은 표정으로 지난 5월에 친 'A레벨' 성적표를 들고 온다. 표정에서 모든 게 읽어진다. 어둠의 동굴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히 발견한 가능성의 빛. 화학과 물리는 준비를 못했고 수학에서 통계 빼고 모두 'A'를 받았다.


내 딸이지만 마냥 신기하다. 대책없는 무모함과 천진함 속에 감춘 자기 확신과 치밀함을 가진 희한한 아이다. 대책없는 무모함은 아내를 닮았고, 치밀함은 나의 장점이다. 영어와 숫자로 그득한 성적표를 설명해주고 앞으로 시험 계획에 대해 말한다. 설명 어디에도 구체성이랄까, 결정된 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불안보다 의욕과 희망에 찬 딸의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내심 A*(100점)을 기대했다는 말은 내게는 하지 않고 아내한테만 했다. 그런 얘기 해봤자 아빠는 조건없는 칭찬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굴러떨어지더라도 지금 발 앞에 있는 돌을 밀어올리는 일에만 집중해보자. 딸아, 그게 인생이야. 잘 살고 있어!




S#3. 세계 지도 - 2021.5.8.토



딸은 그 나이 때 내가 감히 상상하지도 않은 세상을 꿈꾸고 있다. 딸의 세계지도는 하나씩 늘어났다. 도시, 유적지, 카페, 해변… 80일간에 세계일주라도 갔다오려나.


딸은 서울 강남 한복판 외국대학유학원이 즐비한 동네 고시원으로 A-LEVEL 시험을 치기 위해 자신을 밀어넣었다. 25년전 노량진 고시원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던 나처럼.


딸과 아내가 서울로 떠난 뒤 딸방을 청소한다. 3년전 캐나다로 혼자 비행기 타고 떠났을 때 청소하고 오랜만에 하는 청소다. 이불 호청과 침대 시트를 걷는다. 책상과 침대 밑에 묵은 먼지를 닦아낸다. 딸은 청소를 잘 할 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아들도 의자에 입던 옷 가지를 잔뜩 걸어 놓아 내게 한 소리를 듣는다.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청소하고 정리하는 건 내 몫이지만 아이들 방을 청소해주진 않는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을 빼고는... 내가 없는 집을 상상한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고장난 무선마우스에 기름칠을 한다. 맥북 페이지스 문서 편집기 사용법을 익힌다. 묵은 일기에서 감정 키워드를 찾아 글감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정리한다.


'국제 A레벨 시험'의 결과보다도 도전과 진지한 준비 과정 자체가 대견스럽다. 아내와 딸, 아들까지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그거면 됐다. 생활은 원래부터 잘 정돈된 무엇이 아니었다. 자꾸 정돈하려는 나와 그냥 두려는 아내와의 실랑이는 계속되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삶은 너저분한 일상을 그때그때 해결하며 버텨내는 무엇일텐데...




S#4. 뻔뻔하게 살기 - 2021.4.4.일


뻔뻔함은 젊음의 특권인가. 그냥 철이 없는 건가.

아들이 아빠는 살면서 특히 후회될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해봐도 특별히 기억 나는 게 없다. 어떻게 후회없는 삶을 사는 인간이 있겠냐만, 나는 후회되는 일은 빨리 잊는 쪽으로 회피해온 건 맞다. 그래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글쎄… 딱히"

그러자 딸은 서슴없이,

"경일여고 간 거."

갑자기 지난 과거가 생각나 부화가 치민다.

"내가 그때 사립고는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었던 거 기억나?"

"다시 돌아간다해도 그때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내가 후회한다는데 아빠가 왜?"


딸의 말에 할 말이 없다. 국내 수능과 학교 시험 집어던지고 '국제 A레벨 시험' 치는 걸 선택했을 때도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가 없길 바란다고만 말했다. 의미없는 하나마나한 말이었다. 결국 성공도 실패도 너의 일이고 후회를 한다고 해도 너의 일인데 내가 뭐 할 말이 있을까. 저 시절 내 태도도 저랬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아내와 내가 저렇게 키운 건 맞다.


'스스로에게 뻔뻔해지기' 자유롭게 사는 걸 잘 실천하고 있는 딸이 내심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딸의 말은 스스로에게 뻔뻔해진 걸까, 타인에게 뻔뻔해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택과 후회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니 자신에게 뻔뻔해진 게 맞다. 잘 살고 있어 딸!


결혼 전 나는 아내에게 좋은 아빠될 자신이 없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 말은 유효하다. 내 완벽주의가 문젤까, 부모가 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도 어려운, 나를 깎는 일일까?




S#5. 별을 쫓는 아이 - 2021.3.12.금


의심과 회의를 기반으로 하는 나보다 신뢰와 무한 긍정을 깔고 보는 아내가 딸을 더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얼마전,

"네가 치려는 시험의 정확한 명칭이 뭐야?"

"IAL,  인터네셔널 A레벨 시험"

"그 시험에 대해 설명해 봐"

하니, 딸은 그제서야 그동안 비밀 아닌 비밀로 공부해오던 시험의 실체를 설명한다.


오늘 새벽에는,

"네가 가려는 대학이 어느 나라 어느 대학이야?"

라고 물었더니,

"영국의 옥스포드, 임페리얼 칼리지. 다음 순위는 미국의 UCLA,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대학 입학해서 취직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내가 정말로 좋아서 하는 공부를 하고 싶어."라고 했다.


순간, 나는 딸을 이해했다. 그동안 꽁꽁 숨기고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나라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나라면 그런 대학 가려는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네가 해온 노력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놀라지 않았다. 딸의 언행은 진중해서 내가 동화되고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내 삶의 태도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내 특유의 본성은 버리지 못해 현실 운운하며, 캐나다 토론토가 어떠냐고, 거긴 희경이 이모도 살고 있으니… 라고 말했다가 곧바로 말꼬리를 흐리고 도로 집어 넣었다. 지금 딸에게 필요한 말은 그런 게 아니라는 아내의 눈빛이 날아왔다. 설사, 이 길이 아니라고 돌아나오더라도 너는 이미 더 큰 것을 얻은 것이라고 말한 실패를 전제한 내 마지막 위로의 말도 실패다. 부끄럽다.


우리가 물건 하나 낳아났다고 부부끼리 얘기했다. 자기 생각이 꽂히면 앞뒤 재고 따지지 않는 단순함.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야마는 실행력. 행동 후 자기 계획대로 움직이는 치밀함은 나를 닮았나. 무모하리만치 당당한 자신감은 아내를 쏙 빼닮았다.


맞아, 내 딸 규리는 그런 아이였어. 내가 이름 속에 '별(규)'을 넣어 놨었지. 언제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쫓는 아이. 그 별에게로 다가가기 위해 NASA를 들어가겠다던 아이. 미국 '마블'회사 직원이 되겠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노르웨이 한적한 시골마을 이장이 되겠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딸은 꿈을 꿈으로만 그냥 방치하지 않는다.


너는 잘 살고 있는 거야. 인생이 정답은 없지만 그렇게 살아야 되는 건 맞아. 아빠 엄마는 그걸 의심해본 적은 없어. 네가 어떤 길을 가든지 아빠엄마는 무조건 네 편이야.




S#6. 딜레마 - 2020.10.30.금


애플빠가 있다. 물건 볼 줄 아는 사람이 찾는다는 애플은 상품이기 이전에 예술작품이다. 괜한 과찬이 아니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장사꾼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이 반영된 영혼의 제품들이어서 고집스럽지만 고급스럽고, 고가이지만 돈이 아깝지 않다.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삼성의 이건희와 결이 갈리는 대목이다. 잡스의 암투병 소식을 들으며 나는 나의 암투병을 떠올렸고 생의 고통마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딸이 갖고 싶어하는 '아이패드 에어'를 생일 선물로 안겼다. 자린고비 애비로 비치는 것보다 아이들이 소비에 익숙해지는 게 더 두려웠다. 10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제품을 딸에게 덥석 안기고서 자잘한 잔소리는 생략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하지 않겠니?


"아빠는 결국 네가 갈 길을 갈 거란 걸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어. 이걸로 네가 하고 싶은 공부 마음가는 대로 해봐.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건 불안을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동행하는 거란다."


신나게 아이패드 포장을 뜯으며 영접하는 그때, 마침 딸 담임에게서 전화가 온다. 학교 내신등급이 지속적으로 떨어져 혹시 부모와 불화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내는 그런 거 아니며 자기 공부와 가고 싶은 길을 고민하고 있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쉽지 않은 설명이며 담임 입장에선 납득이 가지 않을 말이란 걸 안다.


이것은 나의 딜레마다.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내신 등급의 중요성을 말하는 국어 교사면서 내 딸에겐 속으로 내신 등급? 그딴 거 개한테나 줘버려! 하고 있다. 아무렴 어때, 살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원 껏 해보는 거지. 우리는 그것으로 됐다.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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