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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13. 2023

나는 왜 쓰는가?





정체正體


'나는 누구인가?'가 궁금해서 글을 쓴다. 나를 위한 글쓰기이다. 글은 내 안에 있는 뭔가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도대체 그걸 끄집어내서 뭘 하고 싶은가. 뭘 하고 싶다기보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나를 이해하고 싶다는 성취불가능한 욕망이다. 뭔가를 쓰지 않고는 벙어리 답답한 가슴치 듯 막힘을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위장이 잘려나간 긴 식도에 방심하면 음식물이 정체되는 답답함을 아는가? '구토'의 소중함을 아는가? 구토는 역겨움의 해소이며 중력에 대한 저항이다. 구토는 몸이 반응하는 실존의 응급처방이다. 나는 '구토'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기다림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시간에 꾸역꾸역 건져올린 몇 개의 단어들을 겨우 힘겹게 뱉어낼 뿐이다.


음식물을 마구 욱여넣어도 너끈히 음식물을 받아내는 위장의 융통성이 그립다. 나의 언어들은 분해되지 않은 날 것들이다. 날 것들을 소화시키기 위해 조금씩 느리게 삼킨다. 고생하는 장들이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도록 나는 입안에서 음식물을 잘근잘근 천천히 씹어 삼킨다. 덕분에 나의 감각은 예민해지고 언어는 섬세해졌다.



허영虛榮


'나는 타인에게 정확하게 이해받고 싶어'서 글을 쓴다. 타인을 향한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표현은 타인이라는 존재가 전제된 행위다. 내 글쓰기는 일기장에 비유와 상징으로 암호를 걸어서 서랍 깊숙이 비밀 창고에 숨겨두는 데서 시작되었다. 영원히 발설되지 않을 것만 같던 비밀의 언어들을 꺼내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저를 당신의 언어로 해석해 주지 않을래요?"

끝끝내 '타인은 지옥'이라서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히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평생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에 없는 것 같으니까. 존재가 삭제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당신의 내면을 보았어요." 나는 책을 통해 많은 작가들을 만났고, 내 글을 통해 친구를 만들어 왔다. '허허虛虛'롭기 그지없는 우리들의 수다는 너와 나 사이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榮'이다. 나는 오늘도 '허영'의 꽃을 피우기 위해 글을 쓴다.



욕망欲望/慾望


나는 욕망덩어리다. 하고 싶은 것(欲)이 많아서 욕심(慾)이 넘쳐난다. 나는 나를 불태우면서 산다. 살아 있다는 건 숨을 쉬는 것이고, 숨을 쉰다는 건 매 순간 산화하는 것이다. 너무 급하게 태우다가 죽음을 앞당길 뻔했다. 이제 겨우 천천히 태우는 방법을 알았다. 욕망을 부정한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말 다 집어치우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냥 쓰고 싶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정체'든 '허영'이든 모두 나를 위한 이기적인 동기다.  


인생은 결국 자신에게로 회귀하기 위해 방황의 길을 떠나는 여정이다. 돌아 돌아간 곳이 결국 제자리라니. 인생이 허망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황의 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만 남는다. 방황은 길을 헤매는 과정 자체이다. 삶에서 길을 잃어 힘들 때 얻게 되는 인생의 방향성. 반복된 '길 잃음'을 통해 얻게 되는 구체적 인생의 지도까지. 그렇게 헤매고 헤매다가 회귀한 길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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