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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Jan 18. 2022

삶이라는 단 한 권의 책

... 과잉을 넘어서





그리하여 날마다 계속되는 나의 반성은 이것이다. 나는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적게 말하여라. 많은 것을 적은 말로 하여라.' ... 육필 원고가 키 높이를 넘어갈 때면 이마저 세상에 소음과 잡음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한다.

그 사유의 밀도, 말의 함축, 폭발할 듯 응축된 한 문장. 이 작고 오래된 벼루는 나에게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적게 쓰라고, 더 충실히 살아내고 더 많이 침묵하라고, 나는 불살라 사랑한 것만을 쓰라고, 검고 깊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한 달에 몇 병씩 쓰는 잉크병에 내 붉은 피를 담아 쓴다면, 그러면 난 어떻게 쓸까, 더 적게 쓰고 더 짧게 쓸 것이 아닌가. 한 자 한 자 목숨 걸고 살아낸 것만을 쓰고 최후의 유언처럼 심혈을 기울여 쓸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글만을 써야 한다고 몸부림쳐왔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 잠시도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고 깊은 침묵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찍어 올리고 나를 알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인정을 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것초차 경쟁이 되고 과시와 장식의 독서가 되고 말았다. 독서가 도구화될 때, 그것은 거룩한 책의 약탈이다. 내가 책 속의 지식을 약탈하는 듯하지만 그 지식이 나의 생을 약탈하고 있다.
- 박노해 <걷는 독서> '서문' 중에서


지금보다 몸무게가 15kg 더 많이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갸우뚱한다.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아서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뭐든 잘 먹는다는 게 장점이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먹어도 상관이 없었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만나면 배부를 때까지 먹었다. 체중은 서서히 불어났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운동을 좋아했고 활동량이 많았다. 뭐, 운동을 좀 더 빡세게 하면 되니까하고 변화를 무시했다.


그땐 체중계에 거의 올라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새벽에 눈을 뜨면 체중계부터 올라간다. 과체중일 때보다 몸무게에 더 민감해졌다. 0.5kg 빠지면 예민해지고, 1kg 빠지면 걱정하고, 2kg 이상 빠진 날이 지속되면 병원으로 달려간다. 체중이 줄면 아내한테 혼난다. 또 무얼했느냐고, 요즘 또 생각이 많아지는 거 같다고. 아내는 내 얼굴 윤곽만 보고도 오차범위 0.5kg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나는 거짓말로 얼버무리지만 억지로 떠밀려 체중계에 올라가면 바로 들통난다. 그럴 때면 말 안 듣는 아들 때리 듯 등짝 스매싱이 날아온다.


최근 아내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무려 13kg 감량. 아내의 다이어트는 무릎 수술 때문에 택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내는 중년이 되어서야 생애 첫 다이어트를 했다.

"무릎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어요?"

"배구하고 살 빼려고 달리기 했어요."

"살 빼고 달리셔야지, 살 빼려고 달리셨다구요? 연골은 아껴 써야 해요. 지금은 괜찮을 지 몰라도 나이들어 열심히 다니셔야 할 때 누워지낼 수도 있어요."

아, 시원하다. 주치의의 사이다 발언에 내 속이 후련하다. 내가 그렇게 말할 때는 잔소리로 듣더니만. 나는 선생님에게 더 혼내주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람을 버리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책을 읽지 않는 것.
책을 많이 읽는 것.

학교도서관에 1년 동안 다대출자 리스트를 붙여 놓았다. 80권 대출. 도립도서관 대출 권 수를 확인한다. 대출 권 수 70권. 합쳐서 150권 대출했다. 물론 다 읽은 건 아니다. 절반을 읽었다 하더라도 75권. 내친 김에 정확히 내가 지난해 몇 권을 읽었는지 필사한 메모앱을 열어서 세어 본다. 완독한 책 82권. 평생 필사해 놓은 원고 양만으로도 내 키를 몇 배나 넘어설지 나도 가늠할 수 없다. 사춘기 시절부터 읽어 왔으니 2천 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영양 실조는
양양결핍만이 아니라
영양과잉이기도 하다.
지금, 결핍보다 무서운 건 과잉이다.

과잉이 문제다. 책 많이 읽은 게 지금은 그다지 뿌듯하지 못하다. 아랫배가 묵직해 온다. 독서 과식이다. 지식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내 아는 것의 용량은 작고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혜의 과식이다. 타인의 지혜는 고통의 경험으로 내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나를 살찌우지 못한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읽어 낸 것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인풋과 아웃풋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몸은 체중으로 말한다. 몸은 진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정신의 다이어트에 실패했다. 인풋만 있고 아웃풋은 없는, 지혜는 없고 자의식으로 과잉된 상태.




참된 독서란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자기 소멸의 독서다.

그래서 이렇게 많이 썼나? 아무도 듣는  없는 언어들의 사생아를 이렇게 많이 낳아 놓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한해에 보통 350쪽을 쓰던 것을 2021년엔 700쪽을 썼다. 결국  권으로 나누어 제본했는데 뿌듯함보다 부끄럼이 몰려온다. 박노해의 서문이 지금  순간에 눈에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별한 일도 없는 그냥저냥 무난한 일상들의 연속이었는데 너무 많이 지껄였다. 혼자 지껄인  그나마 다행이다. 말을 아껴쓰는 시인이  높이를 넘어가는 육필 원고를 썼다는 말에도 부끄럽지만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것은  부끄럽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채워진  말들의 성찬은 내안에 '소음과 잡음' 많이 들끓었다는 증거겠지. 생각에 잠식 당하고 생각이 만들어낸 언어들로 매몰되고  것이다. 지식을 약탈하려고 책을 읽진 않지만,  쓰고 싶어 너무 많이 읽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독서는 '자기 강화'였고, 수단이었다.




쓰는 것이 삶이 되게 하지 마라.
절실한 삶이 써 나가게 하라.

초심. 쓰는 이유를 다시 생각한다. 글을 써서 유명해지거나 나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욕망이 내 글쓰기의 초심은 분명 아니었다. 애초 내 글쓰기의 목적은 마음의 정수와 대면하는 것. 장황해진 글이 초심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다. 생각난 걸 우선 지껄이고 보는 방식을 버리기로 한다. 생각을 궁글리고 궁글려서 마지막 남은 한 문장만을 쓰기로…


시를 써야 할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써 나가고 있다.
삶이라는 단 한권의 책을.
생을 다 바쳐 쓴 내 소멸의 책을.

<2021 상•하> 삶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은 계속 집필 중!

* 인용한 문장들은 박노해 <걷는 독서> 아포리즘에서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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