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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15. 2023

남자끼리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상처에 대해서는 "왜 그러셨어요?"라고 따져볼 만한 질문거리가 풍성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상처들을 헤치고 살피는 과정에서는 말수가 준다. 모든 질문의 본질이 "왜 그러셨어요?"가 아닌 "왜 안 그러셨어요?"로 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 한 것을 따져 묻는 일은 한 것을 따져 묻는 일보나 어렵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상처와 애증의 감정이 '과잉과 오바'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애증의 감정은 '결핍과 무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옆에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입은 상처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감정과 욕구를 꺼내보지도 못한 데서 입은 상처는 사실더 깊고 근본적이다.                  
- 선안남 <혼자 있고 싶은 남자> 중에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로 베트남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더라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때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든 했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도 내게 끝내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피의 되물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무심함이 아들에게는 근원적인 상처다. 아버지와의 기억이 빈약하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될 때가 있다. 그나마 남은 기억은 상처로 얼룩져 있다. 무관심했다기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내 아버지, 그 시절 우리들의 아버지는 거의 모두가 그랬다.


아버지는 내게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가족의 두 얼굴>을 쓴 최광현도 입영열차 차창 밖에서 울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다. 나를 입대시켜 놓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삼일 저녁을 울었다던 얘기를 첫 휴가 나와서 누나로부터 들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가 기억난다. 나도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나는 '사랑해'라는 말이 가을 바람에 팔랑거리는 가벼운 거짓말이라고 여겼다. '사랑해'라는 말은 함부로 남발할 언어가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최후로 써야할 무거운 언어로 생각했다. 너무 무겁게 내려 앉아서 어느새 내겐 잊혀진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응, 남자들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라며 무게만 잡았다.


'사랑해'의 무게는 몇 그람일까? 책임이 올라 앉은 무거운 언어일까, 거짓말처럼 쉽게 던질 수 있는 깃털처럼 가벼운 언어일까? 나는 '사랑해'라는 말만은 거짓말처럼 가벼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틀렸다는 걸 이제는 안다. 깃털같은 '사랑해'가 쌓이고 쌓여 바다와 같은 무게로 변해서 마침내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는 것을.


아버지와 나 사이에 '사랑해'라는 말은 저 광막한 우주공간을 떠도는 언어였다. 이제 겨우 아내의 "사랑해"라는 말에 간지러워 귓구멍을 후비적거리지 않게 되었다. 조금더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아들, 사랑해!" 내가 아들을 향해 표현한 사랑의 언어가 더 신뢰감 있고 멋진 남자로 키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아버지의 상처가 내게 트라우마로 되물림되지 않도록, 순도 높은 사랑의 언어로 정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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