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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19. 2023

소멸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장모는 뇌출혈로 쓰러져 삼 개월을 넘게 대답없이 누워만 있다. 오늘은 자기 엄마 얼굴에 자신의 뺨을 맞대고 다정히 말을 거는 아내를 보면서 나는 폭풍오열을 할 뻔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병원 복도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얼마전 강연에서 철학자 강신주가 그랬다.

"사람이 쓸모가 없어졌을 때, 아파 누워있을 때, 그 옆에 누가 있는지 보세요. 그 사람이 진짜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내는 퇴근 후 매일 자기 엄마에게 달려가서 말을 건다. 물론 장모가 건강할 때도 그랬다. 늘상 자기 엄마를 대하는 아내의 모습은 똑같아서 이질감이 없다. 인간이 소멸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모를 것이다.  


병원 복도에서 해석 불가해한 감정들을 붙들고 묻고 또 묻는다.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 장면에서 나는 정지용의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계속 읊조린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저런 사람일 수 있을까.


다음 날, 나는 혼자 장모에게 병문안을 갔다. 아내처럼은 아니어도 나도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장모님, 어제 울 엄마가 김장을 했다네요. 올해는 장모님이 하신 김장김치를 못 먹겠네요. 일어나셔서 올해도 작년처럼 저랑 김장해야죠."


"박서방, 이제 자네도 엄마한테로 돌아가게."

장모가 무언으로 답했다. 나는 잘 안 가던 나의 엄마한테 이틀 연속으로 찾아 갔다.




"엄마, 걱정 좀 그만해!"

이 말에 멈추면 임팩트가 부족하다. 엄마의 걱정을 없애려고 안심시키는 말 정도 밖에 안 된다. 평소에도 가볍게 했던 말이니까.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걱정, 걱정, 평생 걱정만 하다가... 살 거야?" 살다 죽을 거야? 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조금 전 병원에서 장모를 보고 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죽음을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이일 테니까. 그래서 낮고 묵직하게 한 마디 더 보탰다.

"내 나이도 이제 오십이에요. 집에서 ("어설프게 가장 행세하며"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편안하게 밥 얻어먹고 사는 웬만한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암환자였던 아들이 나이 오십이 되어서 자취생활을 하는 게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엄마는 20년 넘게 내가 사는 모습을 한번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엄마의 의지라기보다 내가 달아났기 때문이다. 나를 모르니까 걱정스러운 거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는지 엄마는 아직도 모른다.


당신이 잘 아는 아들은 여리고 내성적이라서, 당신이 보호해야 할 암환자라서... 당신의 습관성 걱정은 당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안정제고, 당신이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욕망의 대리물이다. 이제 당신이 하는 걱정은 지긋지긋해요. 그러니 제발 이제 나를 그만 놔줘요. 내가 끝내 할 수 없는 이 말들은 가족들을 결코 이해시킬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한 순간도 부모를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부모에게서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다. 그 안간힘의 정확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아버지가 술을 단칼에 잘라냈다는 동생의 말을 들었다. 동생과 누나가 같이 있을 때 한 잔 마시고 잔을 엎는 모습을 보고 동생은 놀라워했다. 내가 봐도 놀랍긴 하다. 몸이 받아들여주지 않아 못 마시면 못 마셨지 자기 의지로 끊지는 않을 사람이 술과 아버지에 대한 내 정의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술상을 엎던 당신이 이제와서 왜 갑자기 술병을 깨 버렸는지를... 반성? 자각? 두려움? 부끄러움? 용서?... 이도저도 아니면, 단순히 몸이 안 받아줘서? 마지막 이유여서는 안 된다.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너무 허망한 결론이니까. 끝내 자신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건 내가 용서할 수 없으니까.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쿨쿨, 세상 편안한 오침을 즐기는 중이다. 자신의 죄를 이미 하느님이 용서했다면서 하느님의 품안에서 행복해 하는, 영화 '밀양' 속 유괴살해범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낮잠이 너무 편안해 보여서 하느님이 아버지의 과오를 이미 용서하셨나 싶어 문을 얼른 닫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되니까.


아버지가 술과 손절한 이유를 물어 본 적 있느냐고 동생에게 물었다. 엄마, 누나, 형... 가족들에게 젊었을 때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것도 같더라는 애매한 말을 했다. 직접 들었단 말인지, 엄마나 누나한테 전해 들었단 말인지, 아니면 자신의 추측인지는 얼버무렸다. 말 끝이 '했던 것 같더라'였다. 사과는 하느님이나 대리인을 통해서는 안 되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까? 나는 아버지에게 직접 사과를 받고 싶었다. 동생과 말을 섞다가 또다른 언어의 벽에 부딪힐 것 같아서 대화를 접고 집을 나왔다. 나는 가족 속에서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내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내게 말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 당신은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리가 더 필요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이해하고 나는 나로서 이해한 후에야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거리만큼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기도 하지만,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다시 돌아갈 시간이 올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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