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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1. 2023

부모가 된다는 것, 그 무거움에 관하여




나딘 라바키 감독의 영화 <가버나움Capernaum>의 열 두 살 주인공 '자인'은 자신을 방치한 부모를 법정에 세웠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자인'의 눈빛에 매료되었다. 미움과 사랑. 자신을 방치하는 부모에 대한 정갈한 분노와 형제와 인간에 대한 지독한 사랑. 열 두 살이 이런 눈빛을 가지게 해도 되는 거야, 하면서... 나의 청소년기 시절 눈빛이 '자인'이지 않았을까, 동일시 하면서... 만약 '자인' 정도의 방치와 학대를 당했다면 단언컨대 나도 자인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자식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건 죄악이야.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누가 들으면 내가 어렸을 적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랬을 수도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랑과 방치 사이, 방치와 학대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가정은 불안정한 상태로 지탱되는 게 아닐까.




나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 좋은 아버지 될 자신이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서 늘 혼자살기를 생각해 왔다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으므로 내 발언은 거짓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불행을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나름 혼자만 아는 외로운 투쟁을 했다. 자부심일까, 수치심일까? 타인이 '그냥 지옥'이라면, 가족은 '천국의 얼굴을 한 지옥'이다.


아직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내와 자식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혼자 살았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불행한 가정의 공통점은 무지때문이다.  무지한 부모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불행한 가정을 탄생시키지 않으려고, 읽고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했다. 이 또한 편협이라는 것을 안다. 무지는 '지혜 없음'과 같은 말이 아니다. 무지해도 지혜로운 어른이 될 수 있고, 지혜롭지 않아도 자애로운 어른이 있다.


열 두 살 '자인'의 투쟁에 경의를 보낸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자주한다. 말을 해놓고는 항상 후회한다. 내가 어른일까, 아닐까 고민하게 되니까. 나는 자주 회의한다. 가족제도가 인간문명을 인간답게 진화시켰는지 퇴보시켰는지. 내가 가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 오늘도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부도덕과 죄의식에 한 스푼의 딜레마를 타서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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