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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4. 2023

비밀의 역설




"정말이지, 아주 나쁜 일이 있었어. 너한테 그걸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는데... 하려고 해. 그래야 할 것 같아." ...

그런데, 왜 나한테 털어놨어.나보다 더 중요한 게 비밀인데, 더 무서운 게 비밀인데, 그걸 왜 나한테 털어놨어! 어쩌자고 나한테 그런 걸 털어놨어!       
- 김인숙 <벚꽃의 우주> 중에서




"나, 비밀 하나 말해도 될까?"

"아니, 말하지 마! 절대로"


이미 늦었다.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발설해 버렸다. '비밀'이란 단어를 발설한 순간,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이 된다. 비밀을 공유할 사람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죽음을 함께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비밀을 들은 사람은 상상의 나래가 만들어낸 지옥을 살게 된다.


진실을 아는 게 나을까, 모르는 게 나을까. 의미없다. 이미 불신 지옥의 문턱을 넘었다. 그 어떤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사랑과 신뢰와는 무관하게 널뛰는 상상이라는 악마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이때부터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것이 아닌 악마와 지옥도와 함께 살아간다.




비밀을 품은 자는 위험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어머니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비밀은 어머니의 말하기 방식이며 자존의 형식이었다. 비밀이 궁금해서 미치겠으면 당신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라고 유혹했다.


안 돼, 비밀 안으로 들어가면 안 돼. 신경 꺼. 별거 없을 거야. 아니야, 혹시 내가 상상하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지도 몰라.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라구. 호기심이 나를, 당신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게 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잠들어 있던 호기심은 신이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형벌이었다. 당신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 편을 만들었다. 자주 귓속말을 했고, 말하기 전에 주변을 살폈으며, 번뜩거리며 실눈을 떴다. 쉿! 자신의 입술을 검지손가락으로 닫았다. 비밀은 자신의 것일 수도, 타인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귓속말은 자기 옆에 사람을 두려는 가스라이팅의 수법이기도 했다. 그 귓속말을 듣기 위해서 나는 당신 곁으로 몸을 바싹 기울여야 했다. 비밀에 배제되면 소외와 외로움이라는 벌을 받게 되고, 비밀을 공유하게 되면 지옥으로 빠져들게 된다.


어머니가 만들어낸 비밀의 제스처들의 대부분은 빈 깡통이었다는 걸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비밀이 많거나, 많아 보이는 사람을 멀리했다. 그런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능력이 생겼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그림자마저도 비밀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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