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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5. 2023

나는 니체 스타일!





니체를 분석한 철학서는 너무도 차고 넘치니까, 나는 니체 철학을 분석(물론, 그런 능력도 없거니와)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니체 감상문을 쓸까한다. 니체 헌정문 정도 될 것이다.




용기

니체가 나를 새롭게 가르친 건 없었다. 니체는 지금까지 내 삶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 산 게 아니라고 말해 주어서 니체에 빠져 들었다. 부정과 긍정,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건강과 질병... 나는 그 경계에 서서 어느 쪽으로든 넘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니체는 나를 경계에 세워둔 채 어디로든 완전하게 넘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위태로운 경계에 서 있어서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었다.


니체의 철학을 나는 '용기의 철학'으로 명명한다. 인류사에 이렇게 용감하게 발설하는 인간이 있었을까. 말랑말랑한 언어로는 절대로 깨어버릴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사명의식이었다. 선언적이고, 공격적이고, 거칠고, 거만하기까지한 '이 사람'의 언어가 내 정신의 용기근육이 울끈불끈 솟아오르게 했다. 숨고 싶을 때 <이 사람을 보라>를 읽으면 고개를 빳빳이 처들 수 있었다. 허세가 올라올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 차라투스트라의 호통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간에 대한 용기있는 호통은 인간을 긍정하는 따뜻한 애정에서 솟아 나온다. 니체의 철학은 사람이 좋아지게 하는 착한 철학이다. 죽음 앞에 나를 세우니 두려움이 없어졌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찰나, 그 좁은 틈 사이에는 죽음이 끼어 있었다. 나는 죽을 각오로 살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고 나서 오늘은 내 마음이 말하는 진실의 언어를 따라 천천히 걸어갈 수 있었다. 나의 언어는 진중하지만 단단해졌다.




문체

니체의 마지막 책, <이 사람을 보라>는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라는 작은 제목으로 구성되었다. 제목에 '나'를 등장시킬 수 있는 글쟁이는 거의 없다. 니체는 글쟁이라기보다 철학자이다. 그래도 그렇지, 용감함을 넘어서 이토록 오만한 제목이라니... 그의 문체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나르시시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나는 니체에게서 건강한 나르시스트가 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제목만으로도 '니체가 니체했음'에 매료되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니체의 말.

자신 스스로를 폭파시키고 죽는 것을 각오한 용기의 끝판왕. 인간은 진실 앞에서 두려움에 떤다. 진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앞에서 의연한 언어로 우리들의 비겁을 해체한다. 니체는 언어를 정교하고 정확하게 썼다. 언어의 한계에 앞에 봉착했을 때는 은유와 상징으로 확장을 시도했다. 그의 언어가 어려워지는 지점에서 나는 읽고 또 읽었다. 그를 이해하고 싶었고, 나를 알고 싶었다.


"좋은 문체는 좋은 인간에게서 나온다." 니체의 말.

니체의 문체를 닮고 싶은 건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나의 욕망이었다. 나는 시나브로 니체의 문체를 닮아가고 있었다. 어설펐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고, 호기를 부렸다. 그럴려면 더 침잠하고 깊이 생각해야 했다. 생활은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걱정은 사라졌다. 나는 자유로워졌다.




내가 니체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나'는 '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니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의 일부가 아프고 괴로웠지만, 삶이 전반적으로 건강해졌다. 현대 철학자 중 니체만큼 많이 인용되고 사랑받는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니체는 생활철학자다. 나는 니체와 함께 살아간다. 나는 니체 스타일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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