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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6. 2023

카뮈와 시오랑을 만났던 밤




삶이 무의미하다는 부조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다고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카뮈를 만났다. 사춘기 시절 내내 실존을 만지작거리며 살았다. 뭔지 몰랐지만, '실존'이란 말은 왠지 멋이 있었다. 삶의 부조리의 끝자락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자살이며, 자살은 가장 궁극적 자기애라는 카뮈가 한 말에 반해 있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품고 다닌 '자살'은 나를 자유롭게 했다.


무의미 한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의 용기를 삶의 의지로 지분을 조금만 나누어 준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아졌다. 무의미의 두려움이 바닥을 칠 때, 삶에 대해서 용기를 내기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내가 끝내 죽음을 스스로 실행하지 않은 것은 완전한 바닥에 가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용기는 없었지만, 살 용기의 불씨는 언제나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말이다'고 하는 대사는 철학적이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전환 사이에 우리의 마음은 어떤 힘이 작동해야 하는 것일까. 넘어가기 불가능해 보이지만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두 고개 사이에는 백지 한 장 차이도 나지 않는다.


죽음의 의지를 삶의 의지로 바꾸어 놓는 짧은 찰나, 삶의 의지를 꺼버리고 죽음으로 가는 짧은 찰나... 짧은 찰나의 정지된 영원의 시간이 있다. 젊은 시절 나는 자살을 품고 살았지만, 에밀 시오랑이 그랬던 것처럼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시오랑은 수시로 자살을 이야기하는 언행이 불일치하는 그를 두고 언제 죽을 거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마음만 먹으면 죽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자살하느냐고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의 말은 코미디 같지만 카뮈의 실존주의와 맞닿아 있다.




죽을 용기를 삶의 의지로 바꿀 수만 있다면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 자유는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만든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문제거리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한낱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인생 좀 살아본 어른들이 죽을 용기로 살아가라는 말은 실존주의의 생활 버전이다. 어른들의 이 말을 죽음 힘을 다해서, 없는 힘을 짜내어 살아 보라는 얘기로 단순하게 해석하면, 죽으려는 사람에게 더 죽으라는 절망의 메시지가 된다.


자유는 스스로 찾아내야 할 삶의 에너지다. 실존은 외로움과 싸우는 법을 알려준다. 매일매일 죽음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은 용감하다. 용기가 있어 자유롭다. 자유롭게 유영하기 위해서는 소유한 것이 없어야 한다.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는다. 악을 만나면 맞써 싸울 수 있다. 내가 지켜내야 할 것은 오직 자유, 하나 밖에 없다. 자유로운 자는 모든 '다름'을 품을 수 있다. 자유는 여유를 선사하고 그렇게 여여해진 인간은 멋스럽다.


무의미, 죽음, 용기, 자유, 용기,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자유... 용기, 용기, 용기...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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