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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Nov 23. 2023

전문가는 없다




살랑거리는 실바람에도 밖으로 드러난 연한 속살이 쓰라리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연기할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아리고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스스로 기다림의 시간으로 채워야 한다. 딱지가 앉고 그 안에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상처는 더 야문 살이 될 것이다. 흉터는 통증을 견뎌낸 시간의 증거다.   




어제 Y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가 뇌전증 쇼크로 119를 불러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했다. 엄마와 아이가 병명을 알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약을 복용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안 먹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의 엄마가 약을 먹이지 않으려는 걸 거예요. 뇌전증은 죽을 병도 아니고, 무서운 병도 아니고, 더러운 병도 아니에요. 약간 과한 통계이기는 한데 인구 중 100명 중 1명 정도로, 나쁜 인식과는 다르게 흔한 질병이래요. 대부분은 두려워서 무시하고, 무시해서 모르거나, 알아도 숨기고 싶어해요." 라고 나는 Y선생님에게 말했다.


아이 엄마는 '간질 발작'이라는 금기의 병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병원 그 어디에도 질병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 무지의 마음. 아이는 무서운 공포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트라우마로 남기 전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면 되는데... Y선생님은 내 말에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 선생님은 뭔데 이렇게 자신있게 아는 체를 할까, 하며. 나는 선생님이 아이 엄마에게 얘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결정적 한 마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도 뇌전증 약을 먹고 있어요. 효과가 아주 직빵이예요. 아이 엄마에게 제 얘기해주면서 약 먹으면 금방 괜찮아지니까, 약을 먹이라고 설득해 주세요. 저도 약 먹은지 3년이 지났고 증세가 없어졌어요. 주치의가 안전한 게 좋다며 조금더 복용할 것을 권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뇌전증 약을 먹으면서, 현대의학이 약의 발전과 같이 해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약효과는 정말로 뛰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내가 새 학교로 전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는 내게 반갑다며 환대의 인사를 건냈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뒤를 돌아보며 내게 말을 걸었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 외로운 아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직감했던 것 같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지우개를 입에 넣고 씹었다. 눈 흰자위를 드러내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한참 동안 경직된 채로 팔다리를 떨었다. 나는 놀라서 담임선생님을 부르러 교무실로 뛰어갔다. 선생님과 교실에 돌아왔을 땐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아이는 의자에 앉아 입에 묻은 침과 땀을 화장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죄를 지은 듯이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눈 앞에 펼쳐진 허공의 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정과 체념, 수치스러움 같은 것을 함께 품은 눈. 가끔씩 뇌전증 증세를 목격한 선생님은 오히려 놀란 나를 안심시켰다. 괜찮다며 친구가 또 그런 증세를 보이면 오늘처럼 선생님을 부르면 된다고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서워서 아이를 피해 다녔다. 가끔씩 미친년이라고 대놓고 놀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그 병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 무지했다.




'뇌전증'을 이전에는 '간질병'이라 불렀다. '간질' 이전에는 '지랄병'이라고 불렀다. 아마 '지랄병'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악귀가 씌였다며 굿을 하거나 퇴마사를 불렀을 것이다. 약이 없던 시절에는 자연치유가 될 때까지 방치했던 병이었다. 여러가지 증세의 단계가 있지만, 쇼크 상태로 들어 갔을 때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혀 흰자위가 보이고, 팔다리가 경직되고, 소변을 지리기도 하며, 헛소리를 하기도 해서 마치 악귀가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쇼크 상태로 넘어갔을 때 자아를 함께 잃어버린다. 차라리 이때가 낫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기억이 나지도 않으니까. 진짜 공포는 약하게 뇌파의 혼란이 찾아왔을 때이다. 이 상태를 의사는 '부분 발작'이라 불렀다. 아마 전문의도 뇌가 일시적 오류를 일으키는 이 상태를 정확히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날짜, 요일 등 시간 인식이 불능한 상태. 공간 인식 또한 불능이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시간은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진공의 상태에 빠진다. 의식이 완전히 셧다운 된 게 아닌 채로 혼미한 상태가 지속된다. 덥고 답답해서 가슴을 쥐어짠다. 의식이 살아 있어서 엄청난 공포가 함께 밀려온다. 섭식 욕구(이것은 저혈당 쇼크 증세, 한 동안 이 증세와 헷갈려 했었지만 지금은 정확하게 구분한다)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특히, 시공간에 관한 인식,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상태가 지속되고 우주 공간에 중력도 느껴지지 않는, 버려진 미아가 된 느낌이랄까.




'시야가 좁디좁은 전문가의 세계'는 의사에게도 해당된다. 위장관 전문의에게 신경정신적 증세를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뇌신경과 의사에게 저혈당 증세를 설명해도 그는 뇌파 검사 수치가 정상이라며 무시했다. 위 전체가 잘려나간 몸의 상태가 어떤지 경험해보지 않은 위장관 전문의도 내 몸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 모든 일을 경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경험 당사자가 가장 정확하게 안다. 물론 자세히 관찰하고 자기 몸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가능하다. 상태를 정확하게 언어로 묘사하고 전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전문의는 자신의 지식 체계에 들어있지 않으면 무시한다. 내가 만난 의사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체계 속에서 환자의 질병을 바라봤다. 원인불명이나 오진은 대개 이런 이유때문에 생긴다.


교사인 내 직업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 경험과 지식 체계 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 한다. 모든 교사는 전문가를 자처하지만, 가장 비전문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학생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한다.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신이 '전문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 모르는 영역이 훨씬 넓다는 걸 인정할 때 도움받을 사람을 찾게 된다.  




디르크 브로크만은 <자연은 협력한다>에서, 인간의 뇌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신경세포는 각자 고유한 전기적 신호를 비동시적으로 나누고 소통한다. 각자가 가진 고유 주파수가 조화롭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간혹 전기신호가 '동기화 현상'을 일으켜 신경세포가 같은 박자로 전기신호를 내보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면 뇌파가 증폭되어 일시적으로 오류가 일어난다. 요컨대, 각자 다른 뇌파의 박자가 억지로 하나로 같아질 때 일어나는 과잉현상이 뇌전증이다.

자연 규칙이 이렇다면, 나는 뇌세포가 인간 개체라고 보고, 다음과 같이 상상적 추론을 해 본 적이 있다.

"인간은 각자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다른 주파수를 하나로 맞추기를 강요한다면 결국 개인은 파괴되고 만다."


질병이나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건 위로를 받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질병이나 상처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인식하기. 부끄러운 치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내 몸과 마음의 모양과 구조를 잘 모르거나, 사용법을 몰라서 생긴 실수 정도라는 것. 드러난 결과의 원인을 찾으려는 자기나름대로의 노력이 중요하다. 이때는 주변의 도움이 약간 필요하다. 자신이 찾은 원인과 증세를 발설함으로써 그 사람을 이해하는 문이 조금 열린다. 질병과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려는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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