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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2. 2023

우리를 구속하는 세 가지





인간에게 미래라는 시간은 넉넉 잡아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자신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100년을 빼고는 무의미하다. 자신의 죽음 이후 이어질 시간은 한낱 흥밋거리의 공상적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의식이 죽으면 시간도 함께 소멸한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다분히 유물론적 사고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의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흐를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 세계에서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가 파괴되는 날이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오만한 상상이다. 지구는 인류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오래 존재할 것이다. 45억년 전에 지구는 생겨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원소들의 세상, 미생물의 세상, 식물들의 세상, 공룡들의 세상…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호모사피엔스의 세상이 잠시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공룡이 지구에서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졌던 것처럼 인간도 지구에서 잠시 살다가 어느 순간에 가뭇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 이후 지구에는 어떤 생명체가 주인이 될지, 생명체 자체가 사라진 뭇별로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세는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런 뒤에도 지구의 시간은 어느 정도 이어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인간세가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은 공룡들이 영원할 것처럼 살았던 공룡들 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간은 왜 순환하는 시간을 창안했을까? 심지어 삶과 죽음마저도... 그래서 가정해 본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유한성의 시간. 아니면 끝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는 무한성의 시간. 시간의 유한성은 시한부를 산다는 것이어서 삶이 조급해질 것 같고, 시간의 무한성은 영원히 살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서 삶의 무의미 속에 허덕일 것이다. '순환적 시간'을 발명한 건 필연적 관념의 발상이다.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 나서는 길을 용감하게 나설 수 있다.


떠도는 노마드(유목민)에게 시간 인식은 필요 없었다.시간을 인식하고 집착하게 된 것은 정착과 사회화에 삶이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떠도는 인간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다. 대학생 시절 혼자서 무작정 떠났던 국토종주 걷기 여행은 시간 인식을 지워버렸다. 오늘이 몇월 몇일 무슨 요일인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정착했을 때 시간은 정확하게 인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은 중력의 에너지다. 중력이 수렴하는 0점의 공간좌표가 있어 인간은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시간은 원점이 있는 좌표 공간에서 실현된다. 정착이 인류의 원형적 모습이라 착각하지만 인류는 원래 시간 인식이 필요 없는 노마드 상태였다. 농사를 짓고 돈을 모으면서 인간은 시간의 노예로 전락했다. 인간은 노마드를 꿈꾸면서도 노마드를 두려워 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세 가지


시간.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시계 볼 일이 없다. 눈 떠지면 스트레칭하고 호수를 달리러 나간다. 출발지점에서 스톱워치를 새롭게 세팅한다. 시간은 0에서 다시 흐른다. 달리는 시간 동안  들숨과 날숨, 호흡만이 심장 박동과 함께 리듬을 탄다. 리듬은 시간이 멈춘 구간이다. 음악이 매력적인 건 시간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음악 속에 있을 땐 시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래서 나는 달리면서 음악을 듣는다.


돈. 

시간은 돈과 만날 때 구속력이 생긴다. 출근 시간을 지켜야 하고, 마감 시간을 지켜야 한다. 돈에 얽힌 약속들은 인간을 시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밥벌이를 해야하고 밥벌이는 돈벌이를 통해서 성취된다. 돈벌이를 위해서 개인은 노동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써야하고, 돈을 쓰기 위해 또 한번 시간을 써야 한다. 인간의 노동에 돈이 끼어들면서 노동은 소외되었다. 노동과 인간이 직접 연결된 돈이 없던 시대가 그리워진다.


생각.  

돈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상상한다. 인간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가치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대. 그래서 어떤 개인도 소외되지 않을 이상 세계를 꿈꾼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인간에게는 자기 생각의 구속만이 존재할 것이다. 자기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생각이야말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구속의 실체다. 자기 생각의 구속은 타인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관계는 더욱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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