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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3. 2023

수다 재능




어느 날, 적절한 '쓸모의 규칙'을 갖고 사는 인류가 가까운 동네에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름은 빈센트. 이상하게도 빈센트라는 이름을 두고 여자들의 칭찬이 많았다. 나이 들수록 남자가 말하는 사람보다 여자가 칭찬하는 사람에 관심이 간다. 남자들이란 어디에도 쓸 데 없는 '동지애'를 갖고 으스대지만 여자들은 어디에다 써먹을 데 많은 '쓸모'로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빈센트의 쓸모는 이랬다.

"매일 아침 브런치를 만든다." - 그는 '요리 인류'다
"사는 공간을 잘 정리 정돈한다." - 심플하게 산다
"필요에 따라 집을 뚝딱 고친다." - 입만 나불대는 꼰대가 아니라 손을 쓸 줄 아는 인류
"아내의 친구들이 좋아한다." - 고독사의 대상이 아니다
- 강승민의 <쓸모 인류> 중에서




"지아야, 네 남편 오늘 하루만 나한테 빌려 줘! 내가 인생상담 좀 받게."


"나 지금 남편과 데이트 중이야."
"그래? 그럼 둘이 이리로 와.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까?"


"이번 우리 모임엔 네 남편 꼭 데리고 와. 넌 바쁘면 안 와도 돼. 네 남편만 보내."


아내가 없어도 아내 친구들은 우리집에서 몇 시간이고 나랑 수다떨다가 간다. 아내 친구들은 모두 내 친구고, 그녀들은 아내보다 더 내 편이다. 수다 중에 남편들 얘기가 나오면 친구들은 아내에게 "너는 그 입 다물라."며 내 편을 들어준다. 친구들의 아내에 대한 부러움 섞인 질투나, 나를 좋아해주는 친구들에 대한 아내의 질투도 모두 사랑스럽고 즐겁다.




수다는 나의 재능이다. 나는 남자들의 술자리보다 여자들의 수다자리가 더 편하다. 나는 이상한 정체의 남자인가,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정신이 건강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모든 의심을 거두어 버린다. 여자가 앞도적으로 많은 내 직장에서도 나는 그녀들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대화 중에 내가 "남자들은..."이라고 말을 꺼내면, 어 당신도 남자였군요, 하는 표정으로 확인하는 정도. 금새 시부모 얘기, 남편 얘기, 자식들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여자들 앞에서 나의 성별은 무의미하다.


나도 이런 내가 싫지 않다. 삶의 조건이 바꾸면서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 엄청난 장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내면의 본성과 외연의 행동이 일치하자 내적 갈등이 사라졌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알아차리는 것부터가 어렵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지 점검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표현'이다. 이전에는 표현할 줄 몰랐고, 지금은 표현한다. 솔직하게 표현하는 도구를 장착했다. 도구는 언어다. 말과 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과 글이 일치되게 사는 것. 실수하고 부족한 나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 안에 있는 것이면 어떤 것도 괜찮다는 용기는 죽음을 대면하고 나서 얻은 선물이었다.




강승민의 <쓸모 인류>는 재미있는 책이다. 나는 강승민이 말한 '빈센트'의 '쓸모'를 모두 갖고 있다. 특히, "아내의 친구들이 좋아한다. - 고독사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든다. 관계맺기에 있어서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솔직하게 표현'하기에서 결정적으로 갈린다. 남자들의 대화는 '우열가리기'지만 여자들의 대화는 '공감하기'다. 여자들과 대화하면서 체득한 진실이다.


남자들이 표현하는 언어는 무겁고 강해보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가볍거나 아무것도 없다. 여자들이 표현하는 언어는 가볍지만, 내포된 의미는 진중하고 무겁다. 여성들의 언어는 반어와 해학이다. 내가 이렇게 성차별적('역성차별적'이라 해야 정확할 수도 있겠다) 발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남자들은 이렇게 소소한 수다 글을 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여성들의 글은 감상적이 아니라 공감력이고, 소녀적이 아니라 섬세한 일상성이 잘 표현된다. 이것은 문학이 본질적으로 가진 힘이다. 내게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대보라고 하면, 한강, 임경선, 은유, 최은영, 김소연, 정여울, 김인숙, 김남주, 김애란, 김이설, 은희경, 정이현, 정지아, 이희영, 손원평, 김금희, 조경란…

지금 나의 친구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지아, 현지, 미선, 지영, 영선, 선윤, 현미, 지은, 분정, 유진, 시영, 현희, 선영, 혜송, 재희, 금혜, 은숙, 미경, 송이, 경미, 정민, 점숙, 원숙...




그 많던 남성 작가들은 다 어디로 숨은 것일까? 매일 책을 끼고 살지만, 신간들의 목록들에서 남성 작가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문학에서 남자들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눈에 띄는 현상이고 팩트다. 남자들 스스로 씌워놓은 '사회성 짙은 ', '역사 의식 강한' 같은 스케일이란 게 고작 문학계 성추문이었다. 좀 지난 이슈이긴 하지만, 나는 몇 년 전에 온 나라 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단계 성추문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성작가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니까.


내가 문학을 사랑하고 글쓰기 좋아하는 남자라는 건 부끄러움이자 희망이다. 나는 '술, 자본, 능력, 권력, 힘' 소위 '강함'으로 대별되는 남성의 것들을 소유하지 못했다. 대신, 섬세하고 예민함으로 무장한 인간으로 성장했다.


남성 작가들이여, 거대한 스케일은 잠시 접어두고 섬세함과 솔직함의 극한으로 밀어붙여 보자. 조금더 좀스러워져도 된다. 남자들이 문학에서 살아남을 길이다.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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