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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4. 2023

당신은 꽃이 좋아요, 화분이 좋아요?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낯선 생명체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상대에 대해 모르고 또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름을 붙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첫 단계였다는 걸.
- 은희경 <또 못버린 물건들> 중에서


생명을 키우는 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책임지는 일을 싫어하던 내가 굳이 자취방들이 선물로 화분을 요구했었다. 분무기로 물을 주면서 생각했다. 얘들이 죽는다면 내가 생명에 대한 책임을 다 못한 게으름 때문일까, 이들의 생명 연한이 다한 자연사일까. 생명에게 게으를 수는 없었다. 집을 길게 비울 때는 빨리 집에 가서 물을 줘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시들어 쓰러진 애들에게 물을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 허리를 세우고 꿋꿋하게 다시 살아났다. 흰색과 초록색이 선명한 잎을 보며 감사했었다.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송이 선생님에게 받은 이끼식물의 정확한 명칭을 아직도 모른다. 이끼식물을 관상용으로 키우는 걸 '테라리움'이라고 통칭해서 부른다는 정도만 알아냈다. 이렇게 흔한 식물의 명칭이 검색해도 왜 찾아지지 않는지 의아했다. 검색하고 포기하고 검색하기를 포기한 여러 날, 영원히 포기해 버렸다. 은희경의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읽다가 문장이 깨달음 하나를 주었다. 명칭을 찾지 말고 이름을 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구나.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이별이 힘들다는 것을 무의식이 예감했을까. 이름을 지어주기엔 이미 늦어버린 것일까. 나는 끝까지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냥, 1번 녀석, 2번 녀석, 3번 녀석...




분갈이 한 이후, 갈라져 독립한 줄기 형제들은 아홉에서 셋으로 줄었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이들의 죽음은 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생명 연한을 다한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정십이면체의 유리관에 담겨 내 방에 처음 들어온 녀석들은 빨리 자랐다. 무럭무럭 자라나서 유리판 천정에 머리가 닿아 허리가 구부러졌다. 성질 급한 녀석부터 늙어갔다.


녀석들이 불쌍해서 분갈이를 해줬다. 녀석들의 키 크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먼저 피어난 아랫쪽 잎들이 말라 떨어졌다. 아랫쪽 잎이 하나 떨어지면 줄기 꼭대기에 새로운 생명이 하나 올라왔다. 키는 커가고 잎은 빈약해지고 허리는 휘어갔다. 볼품 없이 허리가 굽어가는 모습이 등이 굽어가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노인1, 노인2, 노인3이라고 불렀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서 늙어가고 있었다. 식물 줄기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잎이 푸르름을 잃을 때까지 물을 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책임이니까. 이제 줄기는 하나만 남았다.




오늘은 장모가 누워있는 병실에 혼자 들어섰다. 장모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툭 떨어져 있었다. 마치 허리가 꺾인 내 자취방의 테라리움 같았다.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생명의 꽃. 장모의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바로 세워보았지만 고개는 다시 떨어졌다. 나는 장모 오빠의 장례식장에서 장모의 손을 딱 한번 잡아 본 적이 있었다. 옆에 있는 베개를 받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덮고 있는 이불을 들췄다. 근육들이 빠져나간 허리가 무방비로 틀어져 있었다. 간호사가 잠깐 들어왔지만 그냥 나갔다.


침대 머리를 조금 낮추고 용기를 내서 장모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고개를 반듯하게 세웠다. 내친김에 방수포와 장모의 허리 사이로 양손을 깊숙이 찔러넣었다. 앙상한 엉덩이를 받쳐잡고 내쪽으로 당겨반듯이 눕혔다. 가래 제거를 위한 이모빌라이저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래가 묽어지자 기침을 심하게 했다. 묽어진 샛노란 가래가 입 옆으로 튀었다. 가제 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지금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가래 석션이 끝나고 간호사가 나갔다. 장모가 입고 있는 환자복 맨 윗단 단추를 채워주다가 옷 위로 비치는 장모의 가슴을 보았다. 아내의 젖가슴을 닮았다. 생명을 품었을 젖가슴을 보며 아내를 생각했다. 살면서 누구도 아프게 찔러 본 적 없었을 둥글둥글한 저 젖가슴(한강의 '채식주의자' 문장을 오마쥬함). 누군가를 위해 품기만 하던 저 서글픈 가슴을 나는 무람하게 쳐다봤다. 장모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나처럼. 장모에게 죄송하다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아내 대신 내가 와서 당신을 도울 사람은 사위 뿐이라고 능청을 부렸다.




며칠 전, 경미 쌤에게 테라리움에 대해서 쓴 일기를 보냈더니, 아는 친구가 쓴 문장이라며 톡 답문자가 왔다.


"꽃은 완성의 순간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의 형식이며, 화분은 지속적으로 재발견해야할 사랑의 형식이죠."


내가 키운 것은 화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테라리움 한 줄기에 물을 주며 문장을 되뇌었다. 이들이 하나둘씩 떠나갈 때마다 '사랑의 형식'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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