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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9. 2023

강한 것은 아름다워




아버지는 강한 것에 집착했다. 복싱글러브를 아들에게 여섯 살 생일선물로 안겼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은 어김없이 복싱글러브를 껴야했다. 아버지는 앉아서 아들을 상대했고 아들은 빠른 스텝을 밟으며 아버지 얼굴에 원투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다. 술과 주먹으로 붉게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은 아들에게 묘한 흥분감을 일으켰다. 때리고 맞는 이상한 놀이는 아들이 초등학생 4학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주먹이 강해지는 것에 흡족해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장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놀이는 언제나 아버지의 KO패로 끝이 났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잠자고 있던 수컷의 공격 본능을 깨워냈다. 당신의 무심과 자식에 대한 죄책감을 얻어 맞는 것으로 덜어냈다. 어린 아들의 주먹을 맞으며 혼신을 다해 패배자 연기를 했다. 복싱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감정 해소의 선물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남자답고 강하게 키우고 싶어했다.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아들이 탐탁지 않았다. 아들이 싸우고 코피 흘리고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애써 외면했다. 복싱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사각의 공간에 오로지 자신의 동물적인 운동 능력으로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가장 원초적인 매력의 스포츠임을 아들은 어린 나이에 배웠다. 복싱은 육체에 대해 순연한 겸손을 배우는 가장 스포츠다운 스포츠였다.   


UFC격투기를 잔인하다고 혐오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격투기 만큼 철학적인 스포츠도 없다. 진정한 강함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경기 전과 경기 후 선수들의 태도는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경기 전에 선수는 케이지 안에 풀어진 삼 일을 굶은 사자가 된다. 상대를 이유없이 미워하고 죽일 듯이 으르렁대는 한 마리의 맹수. 경기 중에는 오롯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의지한다. 도망갈 곳 없는 곳에 던져진 극단의 조건,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 경기가 끝나고 피 튀기는 육체의 한계를 맛보고 나면 선수들은 예외없이 상대에 대해 겸손의 태도로 급변한다. 한계는 겸손을 가르친다. 승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영원한 승자일 수 없다는 깨달음도 함께 찾아온다. 만약 자신이 영원한 절대강자라면 겸손은 불필요한 덕목일 따름일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이며 유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겸손은 유용한 미덕이다. 케이지 안에 들어가 본 자는 케이지 안에서 얻어맞고 쓰러진 자를 욕하지 않는다. 몸의 한계를 체험으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강한 것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은 베트남 전쟁터에서 터득한 생존 본능이었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라는 걸 전쟁터에서 배웠다. 아들은 중학생 때, 올리버 스톤 감독의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플래툰>을 반복해서 보았다. 영화는 막연하게나마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올리버 스톤 감독도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다. 자신의 경험으로 빚어낸 전쟁의 실체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아들은 전쟁의 실체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플래툰>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에는 적을 죽이는 영웅서사가 없었다. 감독은 전쟁을 아군끼리도 죽고 죽이는 생존 문제에 내던져진 지옥도로 그려냈다.


아들의 섬세한 기질은 강하려는 아버지의 욕망과 언제나 불협했다. 그러면서 아들 안에서 꿈틀대는 피할 수 없는 수컷 본능과 예민함이 또 한번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다. 사춘기 내면은 이것들이 뒤엉켜 싸우는 전쟁터였다. 바깥의 현실은 아버지의 술주정과 엄마와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지리멸렬한 또다른 생활의 전쟁터였다. 지옥같은 전쟁터를 벗어나는 걸 지상 과제로 삼았다. 매일 탈출을 꿈꿨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살면서 극한의 위기 상황을 넘어서게 한 건 아버지에게서 배운 생존 본능이었다. 아들은 주먹 대신 언어를 무기로 장착했다. 아들의 언어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날 선 언어로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아들의 글은 지하 창고 깊숙한 곳에 유폐시켜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자기가 만든 언어에 가장 깊게 베이는 건 언제나 자기자신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정신의 샌드백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두들겨 패면서 강해졌고,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사랑을 더디게 배워나갔다. 아들을 강하게 키우려던 것도 아버지 방식의 사랑법이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밀어내는 에너지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온 힘이었는 걸 깨달았다.




늙은 아버지는 중년이 된 아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탐탁치 않다. 아들은 이 애증의 사슬이 지겹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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