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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08. 2023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대위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가운을 벌려서… 당신 가슴을 보게 해줘요… 아내를 못 본 지 하도 오래돼서…' 대위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 나왔지… 하지만 대위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어. 환하게 미소지은 얼굴로…"

"… 아, 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서워. 말은 정말 무서운 거야…"
"아무리 그들이 적군이라도 매일 얼굴을 보고, '당케 쇤… 당케 쇤…'하는데, 죽이는 게 어디 쉽나… 살인은 쉬운 일이 아니야… 어찌 보면 죽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지…"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참호에 숨서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도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손이 덜덜 떨려서 알렉시예비치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5년 <체르노빌의 목소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녀의 책들은 르포 문학의 무서운 힘을 보여준다.


전쟁은 내게서 먼 얘기지만 결코 멀지 않은, 남의 이야기같지만 내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과거 이야기지만 서슬퍼렇게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 주변과 나에게 면면히 어둠의 경로를 타고 흐르고 있다.


아버지가 사는 집 다락에는 월남에서 찍은 사진들과 줄지어 누운 군인들의 시신이 촬영된 사진들이 자료집처럼 잠들어 있다. 나는 언젠가 그 앨범을 불태울 것이다.  




그렇다, 매 순간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 긴박한 위기감, 생생한 두려움, 그것은 아직도 내 몸에 흐르는 전쟁의 여운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두부장수 소리, 유행가 소리인가! 몸이 해체되어 피가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내안의 긴박감에 비해서 밖은 너무도 무미하고 태평스럽고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나날이 권태스럽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이따금 나는 내 안의 긴장에 대해서, 적어도 숨김없는 그 진실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려 애써 보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서영은 '사막을 건너는 법' 중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아버지의 알콜의존증은 베트남 전쟁 PTSD(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아버지는 실존의 물음 앞에 던져졌을 것이다. 베트남 전투 이야기를 내가 군입대하기 전날 딱 한번 했었다. 수색정찰 앞장 서던 소대장의 철모를 뚫고 지나가는 총알과 선명한 피의 이미지, 죽은 소대장을 옆에 두고 지새운 밤의 공포를 나는 듣고야 말았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도 없는 사태처럼 이야기는 발설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피할 수 없었던 그날처럼...


발설되지 않아 아버지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을 그 이야기의 증인이 내가 되어주어야 했다. 발설은 자식에게 끝끝내 해서는 안 됐을 테지만, 그렇지 않고는 온전히 살아낼 수 없었음을 나는 또 안다. 알렉시예비치가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200명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들었어야 온당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아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듣지도 않고 세상을 떠났다. 살인의 죄책감과 죽음의 공포를 나는 그저 상상으로만으로 가늠했다. 상상이 더 큰 고통이었다. 나는 전쟁이야기를 또 듣게 될까봐 겁나서 아버지 옆을 피해 다녔다. 아버지의 트라우마가 내게 유전적 형질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개연성 있는 상상을 하며 자랐다.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하다는 진실을 체득해버린 사람은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사선을 넘어 살아돌왔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마는 생의 아이러니를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절대 죽기 싫은 본능이 지나가면 스스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따라 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삶에 대한 애착보다 권태와 허무 속을 허우적거린다. 무사태평하게 물처럼 흘러가는 세상과 섞일 수 없는 기름이 된다.


나는 항암치료가 끝나고 권태와 허무를 톡톡히 경험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에 내게 삶의 목표는 분명했다. 꼭 살아내야 한다는 것 단 하나. 항암치료가 끝난 후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난 뒤가 더 힘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우울과 허무에 긴 시간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생각하고 쓰며 시간을 견뎠다. 내겐 어둠에서 벗어날 언어가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술에 기대는 것 뿐이었다.  


죽음의 극단적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는다. 전쟁도 그렇고, 질병도 그렇다. 아버지는 전쟁을, 나는 암을 경험했다.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을 50년 전에 경험했고, 나는 암수술과 항암치료를 10년 전에 받았다. 아버지의 전쟁후유증은 아직도 진행형일 것이다. 유년 시절 나는 술에 쩌들고 폭력을 쓰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암에서 벗어난 후에 찾아온 내 우울과 허무의 실체 또한 알지 못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이해할 수 없음'의 경험으로 비로소 나는 아버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전쟁이야기는 르포가 아닌 소설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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