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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10. 2023

선인장과 소사나무





선인장

아버지는 선인장을 사랑했다. 강한 생명력과 가시가 좋다고 했다. 내가 어릴 적,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집에는 크고 작은 선인장 화분이 쉰 개는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화분 살 돈이 없어서 합판으로 화분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선인장에 무심했다. 선인장은 무심해야 잘 큰다고 했다. 물도 주지 않았다. 주인이 게을러야 죽지 않는다고 했다. 장마철에는 비를 맞지 않게 누나와 나는 선인장을 옮기는 작업을 도와야 했다. 선인장도 꽃이 핀다고 했지만, 가시로 뒤덮인 몸통 어디에서도 꽃이 필 자리는 없어 보였다. 선인장이 꽃이 핀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뾰족한 가시를 보면 내 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어 싫었다. 무심한 아버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빠, 선인장 꽃은 도대체 언제 피는 거야?"


선인장에 꽃이 핀 어느 날, 아버지는 가족들을 불렀다. 얘들은 빨리 지고 또 언제 필지 모르니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자고 있는 우리들을 깨웠다. 가시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선인장 꽃은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색은 더 없이 선명하고 모양은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뒤틀리거나 흐트러짐이 없는 완전한 균형미. 장미, 튤립, 백합 같은 꽃과는 다른 탄탄하고 단정한 자태 같은 게 있었다. 다양한 선인장의 종류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구체적인 이름을 몰랐다.




선인장꽃은 빨리졌다. 어떤 것은 다음날 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도 있었다. 선인장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꽃을 길게 피우면 수분이 빨리 날아가 생존에 불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낮보다 해가 없는 밤에 피는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선인장꽃을 많이 못 본 것은 밤에 피었다가 져서 그렇다고 했다.  


극한의 환경(더위와 추위 어떤 환경이든지)에서 죽지 않는다.

동물들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다.

갈기갈기 찢겨도 잘린 조각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난다.

'그냥 내버려 두기'가 잘 키우는 방법이다.

수명이 길고 느리게 자란다.

가끔씩 피는 꽃은 화려하고 예쁘다.


강인함, 무던함, 무관심, 생명력, 느림, 화려함이라는 단어와 아버지는 잘 어울렸고, 당신과 동일시 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에서 서늘한 가시와 화려한 꽃이라는 양극단을 보곤했다. 광적인 살기와 생명의 사랑이 혼재하는 이중적인 아버지의 눈 때문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느 것이 진짜 아버지 모습일까. 분노와 회피의 부정과 아이같은 낙천과 유머를 모두 가진 사람.

어머니는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사랑하는 걸까. 내가 결혼하기 전 어머니였다면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남자와는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광기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예정된 동일체였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는 위험한 사람이었다.  




소사나무

그 많던 선인장을 어느 한 순간에 다 처분해 버렸다. 일용직 건설노동자에서 군무원으로 직업이 안정적으로 바뀌면서 키우는 식물을 바꿨다. 아버지는 '선인장의 시절'을 청산하고, '소사나무의 시절'로 옮겨왔다. 무성한 가시를 버리고 풍성하고 선명한 잎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자기방어를 포기하고 자기방치를 택했다. 분재라는 식물의 성장을 완전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소사나무의 매력은 무성한 가지와 선명하고 정갈한 잎이 보여주는 잎맥이다. 자유롭게 뻗어가는 가지의 유연함 때문에 분재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나무다. 납철사로 가지를 묶고 꼬아서 원하는 모양을 잡아나갔다. 소사나무는 아버지의 힘으로 멋있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아버지는 동네 뒷산에서 소사나무를 캐왔다. 나는 선인장의 가시보다 소사나무의 잎이 좋았다. 제법 큰 소사나무는 선인장처럼 합판으로 만든 투박한 화분에서 자랐다. 투박한 합판 화분과 소사나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화분에서 나와 이사한 집 작은 마당 구석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집에 들어가면 항상 계단 입구에 서있는 소사나무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왠지 이 녀석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생명을 키우는데 젬병인데 아버지는 생명을 키워내는 마이더스의 손을 가졌다.




선인장, 소사나무와 단풍나무와 사과나무, 대추나무... 그리고 개와 고양이까지(한때는 키우다가 지금은 안 키운다). 전쟁터에서 무수한 죽임과 죽음을 경험했을 아버지는 생명들을 살뜰히 키웠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가 생명을 키우는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평생 술과 폭력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이해와 용서는 엄연히 다르다. 아버지의 고독과 통증이 전쟁트라우마였다는 이해까지는 도달했다. 용서의 길로는? 내가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는 할까? 어느 길로 어떻게 가야 그길에 닿을까? 거기까진 아직 모르겠다.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부양의 책임은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맞으면서 가족의 밥벌이를 극한 노동으로 감내해냈다. 중동건설노동에서 귀국했을 시기와 선인장을 키우던 시기가 일치했다. 아마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선인장의 생명력을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생명을 키우는 것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생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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