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거짓이었다. 거짓말, 어찌된 연유인지는 몰라도 모든 이들이 받아들인 거짓말, 그는 죽어가는 게 아니라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이것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오로지 게라심 한 사람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또 모든 것을 종합해서 볼 때 그만이 문제를 이해하여 이를 숨길 필요가 없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쇠약하고 힘 없는 주인을 그냥 불쌍히 여겼다. 한번은 이반 일리치가 자기더러 가라고 할 때 직선적으로 말한 적도 있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도 없지요?"
이런 그의 말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번거롭지도 않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되면 누군가 자기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장모님, 평생 부족했던 잠을 너무 심하게 몰아서 자는 거 아닙니까?"
내 어머니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난데없이 장모에게 기우는 마음이라니. 이 마음의 실체를 몰라 계속 생각한다. 장모에 대한 연민? 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내게도 다가올 예정된 이별에 대한 회피? 우리들의 엄마라는 모종의 연대?
내 감정은 묵직한 아랫배 장속 깊은 곳에서 공허를 딛고 힘겹게 올라오는 무언가다. 위태롭게 생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고작 공허라니. 이건 아니다. 인생이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도 뭔가 있을 것이다. 발 딛고 일어설 뭔가가 꼭 있어야 한다.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 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사람들의 거짓말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죽음에 대해 등돌리는 시치미떼기가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을 공허와 고독의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작가 김훈은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장모의 초상을 치르면서 나는 그 절대적인 개별성에 경악했다."고 썼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개별성에 몸부림치고 있다.
의식이 없는 장모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아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엄마에게 허락된 시간이란 게, 아내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게 무슨 이유라도 있을 거라며 이유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장모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당신의 오빠를 꼭 이반 일리치를 돌보는 '게라심'처럼 행동했다. 장모는 오빠에게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그것을 똑똑히 지켜봐서 그런지 누워 있는 장모가 더 측은하다고 느낀다. 나도 당신과 나의 엄마의 죽음 앞에 거짓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그것이 당신들을 조금 덜 외롭게 지켜드리는 길이다.
"앗, 지랄한다 가시나! 하하하"
아내는 엄마 목소리가 가장 듣고 싶을 것이다. 내 귀에도 이렇게 쟁쟁 울리는 목소리인데... 지금은 나의 어머니 목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들리는 장모의 목소리는 밀쳐두었던 나의 두려움이다. 내게도 닥쳐오고야 말 어머니와의 이별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무의식이 저지르는 등돌리기. 나는 장모를 연민하면서 내 어머니를 외면하고 있다.
죽음은 나의 일이 아니라며 미친듯이 생활을 경주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암이 내게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너의 죽음은 잠시 미루어진 것 뿐이라고. 그리고 10년을 그럭저럭 살아내고 나니 다시 죽음에 시치미떼고 거짓말하려는 나를 장모가 또 알려준다.
이번 글쓰기 모임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을 읽고 글을 쓰자고 누군가가 추천했다.
"아, 지금 왜 이러십니까, 저 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