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영화를 직접 만들어 봐야 한다. 미장센, 프레임, 클리셰, 오마주, 오브제, 시퀀스, 콘티... 최초, 언어와 이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이 있었을 뿐이고, 이론은 필요에 의해서 언어로 정리된 것일 뿐이다.
- '독학자 예찬' 나의 브런치스토리 중에서
'소설 창작' 편(브런치 [100-37] 2인칭 시점 소설)에 이어 이번에는 '영화 창작' 편이다.
나는 방송반 교사 13년 차다. 학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내 정체성, 방송반. 스튜디오를 직접 만들고, 생방송을 하고, 아이들과 영화를 만든다.
콘티*
"학교행사 진행 훈련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갈 길은 단편영화 만들기입니다."
내가 방송반 교사를 13년 씩이나 지속한 것은 영화 사랑이 낳은 내 욕망의 투사물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나는 방송반 업무를 신청한다. 방송 업무는 교사들이 꺼리는 자리다. 잘 해야 본전인 일. 내가 원하면 언제든 꾀찰 수 있다. 새 학교에서 맡은 방송실 정비가 내 스타일 대로 완성되고 나면 나는 차츰 본색을 드러낸다.
방송반 아이들을 영화의 신세계(실은, '어둠의 구렁텅'이 일 수도...)로 안내한다. 단편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을 함께 보고,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시나리오를 직접 쓰게 한다. 아이들은 당연히 힘들어 한다. 아이들의 힘듦을 모두 지고가야 하니 나는 죽을만큼 힘들다. 영화 한 편 만들어 출품을 끝내고 나면 체중이 5kg은 족히 빠진다.
"선생님, 시나리오는 완성했는데 이걸로 촬영을 어떻게 하죠?"
이번 작품의 핵심 아이디어를 낸 감독 서영이 찾아왔다.
"뭘 어떻게 해. 카메라 들고 가서 찍으면 되지. 자... 출동!"
안 되는 줄 알면서 나는 능청을 부리며 지옥문을 열고 아이들을 끌고 들어간다. 첫 씬 찍는 장소에서 감독은 멘붕 상태에 빠진다. 카메라는 어디에 세워? 배우는 뭘 하면 돼? 야, 소품 어딨어! 엔지! 다시! 대사는 외운 거야? 연기가 어색해! 화면은 클로즈업으로 잡을까, 와이드로 잡을까? ... 기껏 고생해서 한 컷 찍어 왔더니 대사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다.
"서영아, 힘들었지."
"선생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해야 한다면..."
"이게 없어서 힘들었던 거야. 촬영 설명서, 콘티-스토리보드."
나는 강재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스토리보드집을 무심하게 툭 건낸다. 만화책 같은 스토리보드집을 휘리릭 넘겨 보던 서영은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선생님, 장면들을 이렇게 모두 그려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네 영화의 장면들은 너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어. 그 장면은 배우도, 카메라맨도, 스탭도 아무도 몰라. 그러니 뭘 어떻게 연습하고 준비하겠니. 잘 그릴 필요는 없어. 음... 혼자 그리려면 힘드니까. 씬 별로 부원들과 나누어서 작업하자."
첫 씬의 콘티를 완성해서 복사본을 배우, 카메라맨, 스탭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감독은 배우 연기 연습시키고, 카메라맨은 콘티대로 앵글과 동선을 체크하고, 스탭들은 소품을 미리 준비한다. 자, 슬레이트 준비! 딱! 레디! 액션! 컷! 오케이! 다음 장면! 그래도 콘티가 없을 때보다 우당탕, 우당탕탕, 굴러는 간다. 차츰 탄력이 붙으면 연기와 촬영이 재밌어진다. 계획대로 안 되면 즉석에서 대체할 것을 찾고, 에드립까지 부리는 여유가 생긴다. 그림 잘 그리는, 주인공 역을 맡은 규진이의 빠른 손놀림으로 콘티 스케치는 더욱 정교해진다. 콘티 한 권이 그대로 작품집이다.
"자, 얘들아 봐봐. 이게 10분짜리 우리 단편영화의 콘티의 양이야. 2시간 짜리 프로들의 영화 콘티의 양은 어떨까?"
때로는 멀리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알려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콘티를 들이밀면 아무도 영화촬영을 시작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부러 시행착오를 시킨다. 그래야 '필요'가 생기니까. 필요는 창조의 동력이다.
재회
방송반 서영과 규진을 13년 만에 다시 만났다. 서울 신대방동 주민, 프로페셔널 영상제작자 규진이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 직장 생활의 팍팍함에 대해 덤덤하게 말했다. 영상제작 의뢰 들어오는 일의 80퍼센트는 유튜브이며, 대학시절에 창업해서 졸업하고도 한 동안 영상프로덕션을 직접 운영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했다.
"너희들 지금 모습이 내 인생의 요약판이네."
"그러네요, 선생님... 규진이는 영상제작자, 나는 학교선생님. 규진이 이렇게 만든 건 선생님이에요."
서영이 특유의 귀여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됐지만, 그 시절 표정은 그대로다.
서영을 만나러 오는 길에 차안에서 규진이 자신의 직업 세계를 유쾌하게 풀어놓지 않았다면, 나는 서영의 말이 규진이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만든 건 선생님 책임이라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규진은 자기의 직업을 즐기는 것 같았고, 또 다른 직업에 도전하겠다는 당찬 계획도 있었다. 규진의 직업적 '지분'에 내가 있다는 걸 기분좋게 인정했다.
서영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다. 사범대는 좋은데 왜 하필 '윤리'과목이냐고 대입수시 원서 쓸 때 주변에서 뜯어 말리는 바람에 힘들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윤리과목을 선택했기 때문에 임용고시를 패스할 수 있었다고 했다.
"너 철학을 좋아하는구나. 맞지?"
밥 굶기 딱 좋은 '철학'과 밥 잘 먹을 수 있는 '교사'라는 현실적 절충안으로 윤리교사가 되었다고 했다. 서영도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었다.
"너, 첫 발령학교 있을 때 혼자서 눈물 꽤나 흘렸겠다."
"말 마세요, 그때 자취방에 처박혀서 매일매일 울면서 맥주 마시다가 살이 엄청 쪘어요."
시골학교 첫 발령지 3년 내내 코로나 시국, 사실 지금이 교사로서 학교생활이 처음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학생이 논에서 담배 피우다가 볏단 태워 학교로 연락온 일, 아침 등교하면 반 아이들 전화해서 등교시키는 게 힘들었다는 것, 학생들의 귀여운(?) 일탈이야기를 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으며, 자기반 아이들은 모두 등교해서 자리에 앉아 있다며 신기해 했다.
"내가 암 걸리고 치료하면서 바뀐 생각이 하나 있어."
"선생님, 뭐예요?"
"응,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건 꼭 해봐야 한다는 거. 내가 너희들 나이 때 해보고 싶은 게 두 가지가 있었어. 영화감독과 작가."
얼마전 출근길에 문득 발견했다. 국어교사가 되어서 글을 쓰고 가르치고 있고, 책을 집필하고 있다. 방송반 교사가 되어서 아이들과 영화를 만들고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결국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걸 하게 되어 있다.
"내가 서영 감독님한테 줄 선물을 가지고 왔어. 한번 볼래?"
나는 그해 영화제에서 1등을 받았던 우리들의 영화 <하얀안경>이 담긴 영상CD(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대회주최측에서 증정한 것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음)를 서영에게 선물했다. 카페에 앉아서 우리는 그때를 회상하며 영화를 봤다.
"규진이 너무 귀엽당. 지금 보니 연기도 제법인데… 배우 쪽으로 진출하지 그랬어."
"너, 영화에 출연 안했다고 이러기야! 너 그때 감독 자청한 거 오늘같은 날 올 걸 예상한 큰그림 아냐?"
우리들의 영화 속에는 그 시절 선생님들, 서영이 엄마와 동생, 꼬맹이 내 딸까지... 시간은 우리들을 꿈 많던 그 시절로 데리고 갔다.
"나, 이번에 서영이 너 있는 학교로 전보 신청 냈어. 딱 기다려라. 같이 근무하자."
"정말요? 선생님,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 하하.)
우리는 이제 동료다.
*콘티(continuity): 영화 촬영을 위해 장면의 번호, 화면의 크기, 촬영 각도와 위치에서부터 의상, 소품, 대사, 액션 등의 촬영 정보를 기록한 설명서.
스토리보드(storyboard): 영화 제작할 때, 장면을 앞으로 완성해야 할 영상에 가장 가깝게 그림으로 그린 것.
콘티와 스토리보드는 엄밀히 구분해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보통 단편영화 제작에는 스토리보드(그림)에 콘티(설명)을 함께 작성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통칭 '콘티(그림+설명)'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