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너와 나의 성장기
소식
"선생님, 저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어요. 이제 치료 들어가요."
민제에게서 카톡 문자가 도착했다. 이 녀석은 매번 이런 식이다. 그 동안의 안부도, 과정도, 설명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한 문장. 극단의 자기중심성. 민제는 욕망의 화기를 품은 아이였다. 자기가 원하는 것에 무모할 정도로 자신을 밀어넣었다. 열정이 지나쳐 가끔씩 주변 사람들을 열기에 데이게 했다. 방송반 친구들도 민제를 조금 버거워했다.
민제와 나는 많이 싸웠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 교사로서 훈계가 많았다. 궁금하면 방송기계를 실험하고 세팅을 바꾸어 놓았다. 알고 싶은 욕구와 열정이 지나쳐 방송사고가 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민제에게 항상 졌다. 내 훈계가 민제가 가진 에너지 근처에도 가닿지 못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도 경험한 적이 있다. 죽음이란 단어를 현실에서 인식하던 순간 떠오른 몇몇 사람들. 수술 후 병실에 누워 여기저기 문자연락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의 걱정과 격려 문자가 쏟아졌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가련했고, 위로 받고 싶었고, 그래도 되는 충분한 자격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내가 필요해서 연락해놓고선 얼마지나지 않아 무심해지는 쪽은 나였다. 나는 점점 지독한 나르시스가 되어 갔다. 오로지 살고 싶다는 욕망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 삼켰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에 인간은 존재에 관한 통찰을 시작한다. 나는 민제의 무심함을 미워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경험적으로 상상해 본 사람은 안다. 죽음 앞에 선 자는 두려움을 만났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의 지옥 안에서 '사랑' 하나를 건져 올린다. 먼저, '자기애'를 붙잡고 늘어지고, 그 다음에 타인에게 사랑이 흐르기를 궁리한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잠시 유보의 시간이 주어지면 관계에 대한 재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
통화를 눌렀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 어떤 상태냐고 톡문자를 넣었지만, 답이 없다. 밑도끝도 없는 한 줄의 톡문자를 한참을 멍하니 처다봤다. 민제에게 생의 전환기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 너도 나처럼 스스로를 태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는 이미 알았다. 어쩌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나보다 더 빨리 찾아온 성장의 통증이 다행이라 믿기로 했다. 꼭 나아서 다시 연락해라. 민제야. (2016.11.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