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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24. 2023

죽었니?(4)

네 번째, 너와 나의 성장기




말을 많이 하면 글이 죽는다.


최근 말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아내에게 말을 많이 쏟아내고 있다. 누군가를 죽이는 말들. 당신과 나의 이야기는 없다. 말처럼 살아내지 못하는 잘못은 곧바로 들통이 나고, 글처럼 살아내지 못하는 잘못은 잠시 유예될 뿐이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서부터 글이 번잡스러워졌다.




두렵군요

지영, 미선, 현지와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 현지에게 민제 얘기를 쓴 일기를 보여준다. 현지는 "두렵군요"라고 한 마디만 말했다. 그 한 마디로 모든 의미는 압축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이의 응축된 슬픔이 최근 나를 괴롭히던 우울을 일순간에 덮어버린다. 얼마전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현지는 최근 내 우울의 원인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우울과 슬픔에 빠진 이를 건져내려는 노력보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이 더 위로가 된다.


세상에서 자신의 아들을 기억하는 선생님이 있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큰 위안을 얻을 거라는 지영의 해답은 명료하다. 이러고 있지 말고 직접 나서서 알아보라고 했다. 내 말 속에 민제의 죽음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 괴로움은 민제를 향한다기보다 내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판타지였다.


그래도 그 순간 현지의 "두렵군요"라는 말이 더 위로가 됐다. 아침 공원을 산책하면서 아내는 내가 어떻게 할 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 아이의 생각이 당신을 계속 괴롭힌다면 그땐 당신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민제의 생사에 집착하고 있나? 묻고 또 묻는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고, 잊었다고 믿고 있었다가 나타나는 너의 환영에 나는 괴로웠다. 장장 3년의 걸쳐 풀리지 않는 너의 생사에 관한 이 집요한 감정은 대체 뭘까? 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이제는 슬슬 분노로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욕망

나는 민제에게서 욕망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민제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쌤, 저 홍대 앞 아는 형 녹음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어요. 낮엔 알바 뛰고, 밤엔 곡 써요. 그냥 집에서 이러고 있다간 영원히 음악을 못할 것 같아서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어요."

"잘 했다."

잘 했다니 뭘 잘 했다는 건가. 내가 끝내 저지르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었을까. 민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행착오가 녀석을 발전시키는 힘이었다. 또다시 새로운 시행착오 속으로 자기를 밀어넣은 녀석이 대견했다.


그냥 잘 했다고. 잘 할 수 있을 거라고만 말해 주었다. 선생님은 네 나이 때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너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해 주었다. 진심이었다. 민제의 결단과 용기가 부러웠다. 세상은 언제나 뜨거운 자들의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한 번 시도도 해보지 않고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죽음

그때 나는 암에 걸리기 전이었고 죽음은 먼 얘기라서 너무 쉽게 죽음을 말했다. 민제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건 녀석이 내 어설픈 '키팅 선생 놀이'(영화 <죽은시인의 사회>의 주인공 고 로빈윌리엄스가 연기한 문학선생님.)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2년 동안 매 달 나를 찾아왔을 때 음악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때 나는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말했고, 음악을 모르면서 음악을 이야기했다. 음악이야기할 때 민제는 눈이 빛났다.


너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이것은 순전히 나 혼자 만들어내는 환영이라는 걸 아는 정도까지는 왔다. 내 꿈엔 아직도 가끔씩 네가 나타난다. 꿈 속에서 너는 내가 되어 말하고, 나는 네가 되어 말한다. 나는 진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묻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죽어가고 있다. 내 욕망은 이미 내 안에서 피지 못할 꽃이 되어 죽었다.


이미 내 안에서 민제는 죽었다. (2020.11.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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