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너와 나의 성장기
꿈
악몽같은 꿈을 꾸었는데 눈을 뜨고나니 이 정화된 느낌은 뭐지? 꿈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원없이 하고 펑펑 울었다. 의식이 무의식을, 무의식이 의식을, 서로 의식하지 않고, 또 의식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점이 오늘 아침 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의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이다. 마음은 의식에서 마구마구 날뛰고, 무의식 속에서는 잘 길들여진 양이 되어 꿈을 꾼다.
어제 저녁 아들이 중학교 가면 밴드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빠가 대학생 시절 보컬을 했다고 말 했지만, 아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들과 딸은 내가 노래하는 걸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도 한땐 가수의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또 다른 내 꿈의 한 조각.
아내는 내가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걸 잘 안다. 연애시절 아내는 내가 부르고 직접 프로듀싱한 노래를 듣고 다녔다.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아내를 위해 매일 밤 '폰서트'를 했다. 그 시절 노래는 내 자존이었다. 아내는 '씽어게인'을 시즌마다 챙겨 본다. 아내는 같이 보기를 원하지만, 나는 잘 안 본다. 이유는 음악을 어떻게 경쟁을 하니, 였다. 하지만 나는 가끔 유튜브에 올라있는 영상을 힐끔거리며 본다.
아들은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싱어송라이터가 뭔지는 알고나 하는 소릴까. 가수가 똑같은 가수가 아니라, 진짜 가수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아는가 보다. 가수하겠다고 덤비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두절
오전 내내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작년에 갑자기 백혈병 걸렸다고 문자 온, 음악하는 방송반 민제가 생각났다. 치료는 잘 받고 있을까? 다 나았을까?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문자를 받은 게 꿈에서였나 착각이 들었다. 최근 나는 내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위암수술 이전 특정 기간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내와 병원에서 검사까지 받았지만 이상이 없다고 했다. 기억이 사라지면서 기록에 집착하게 되었다.
카톡방에 들어가서 민제가 남긴 마지막 문자를 확인한다. 모든 기록이 지워져 있다. 꿈일지도 몰랐다. 가끔씩 자신의 음악 활동을 전하던 페이스북 계정도 사라졌다. 방송반 동기 규진에게 민제 소식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갑자기 민제에 관한 모든 기록이 사라졌다. 민제가 사라진 것이다. 내가 너의 흔적을 뒤쫓는 것은 내 기억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넌 기억이 사라지는 공포를 모를 것이다. 잊을 만하면 무의식 저 너머에서 고개를 삐죽삐죽 내미는 너의 마지막 기록을 찾고 싶어 안달한다. 너를 찾고 싶은 게 아니라 너의 기록을 찾고 싶은 절박함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기록의 사라짐은 기억의 사라짐이고 기억의 사라짐은 정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정체가 사라지면 세상이 함께 사라진다. 지금 나는 내 정체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런 내게 너의 사라짐은 일대의 사건이다. (2017.6.28.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