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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위 Dec 25. 2023

살았니?(5)

다섯 번째, 너와 나의 성장기





함춘호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언제나 그림자같은 존재였다. 조연이 멋있을 수 있다는 걸 인고의 시간으로 증명한 음악인이었다. 당대 유명한 가수들이 그의 반주에 노래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알게 됐다. 그의 연주가 따뜻한 건 노래부르는 이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음악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타 반주는 화려하지 않다. 그의 기타 반주는 가수를 빛나게 한다. 절제와 공감이 곧 음악임을 몸소 증명해 보여주었다.


음악과 예술이란, 고독과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자만의 열매다. 혼자서 기타와 고독하게 견뎠을 시간을 감히 상상한다. 너저분하게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진실과 멋을 풍겨낸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는 인생에서 두 가지를 후회한다고 했다. 하나는 기타를 하게 된 것을 후회하고, 다음은 기타에 미쳐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참, 아이러니한 대답이죠?"라고 말했다. 첫 번째 대답에서 시간을 견뎌낸 자의 고독을, 두 번째 대답에서 마스터가 된 자의 욕망을 읽었다.




열정

방송반에서 민제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민제는 방송반 활동도 자신만의 음악 활동도 놓지 않았다. 나는 민제가 음악에 진심이고 앞으로의 진로도 그쪽으로 정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너를 방송반에서 만난 건 중학생이었을 때였으니까. 나는 단편영화 제작에 미쳐있었고, 민제도 방송반 반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학교 축제무대에 올라와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 'Kiss the Rain'을 연주하는 민제를 처음 보았다. 어, 저 녀석이 이런 재주도 있었네, 하고 놀랐다. 연주는 그저그랬지만,(잘 했는데, 어설픈 아마추어인 내가 눈만 높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태도는 진심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 줄 아는 아이, 주위 눈치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따라 걷는 용기 있는 아이였다. 평범한 대한민국 중학생들은 학원과 성적에 집중한다. 나는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집요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궁금했다. 민제의 결핍을 언뜻 보았지만, 더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나는 두려웠을 것이다.  


조용히 혼자 공부하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학교 안에서 나만 알고 있었다. 방송기계 다루는 실력이 쑥쑥 성장하는 모습에 깜짝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는 방송실에 조용히 내려와서 기계를 조작해보고, 선들을 정리하고, 꽂아보고, 실험해 본 것 같았다.

"얘들아, 아무래도 방송실에 도둑이 든 것 같아."

나는 민제를 힐끗 보며 얘기했지만, 방송실의 세팅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아이는 없었다. 그럴 때 민제는 내 눈을 피했다. 몇 번의 방송 사고를 경험하고 나서 민제를 불러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위험한 놈을 방송반에서 확 쫓아내버려, 하는 고민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하는 실력자였으므로 나도 민제의 혜택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고, 바뀌거나 잘못된 세팅이 조용히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민제가 뭘 또 손대지 않았나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 생활의 챗바퀴였다. 생각해보면 민제도 나도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민제의 관심과 진로는 방송과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음악이었다는 사실을 중학교를 졸업하고 알게 되었다. 마이스터고 기숙사 생활을 하던 시절 매 달, 졸업한 중학교 방송실을 찾아와서 나랑 나눈 대화는 거의가 음악 얘기였다. 그때 우린 서로의 진짜 관심 분야를 알게 되어서 놀랐다.  




연대

민제를 보면서 음악에 진심이었던 내 젊은 시절을 향수하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음악이 어떤 거야?"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굳이 말하자면 뉴에이지, 세미 클래식 같은 거요."

"노래는 아닌 것 같구요. 피아노 연주자를 할 지, 작곡을 할 지 고민하고 있어요."

"선생님도 음악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다는 걸 대학가서 알았어.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거든. 락이나 포크, 포크락 가수들을 좋아해. 강산에, 윤도현, 안치환, 김광석... 이런 가수들.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지만... 하긴 그때도 트렌디한 가수들은 아니었으니까."

"중학교 축제 때 쌤과 같이 무대에 올라가 볼 생각을 왜 한번도 못했을까요? 나는 반주하고 쌤은 노래하고..."

"그러게... 그땐 축제 방송반 일하기 바빴잖아. 아니다. 우린 서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었지."




예능을 경쟁하는 걸 혐오하지만 '씽어게인 시즌'을 간간이 챙겨 본다. 이 프로그램을 힐끔거리는 이유는 관종들의 각축장, 욕망과 불안의 줄타기를 하면서 사는 인간들을 보는 게 좋아서다. 그렇게 살게 예정된 인간들의 길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영혼의 불꽃을 태우면서 경쟁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한다. 불안의 연대는 강하다. 아름다운 경쟁도 존재한다는 걸 이들을 통해서 본다. 공감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자들 간의 경쟁은 침묵의 연대라서 매력적이다.

"말하지 않아도 느낌 알잖아, 우리."

"우린 모두 음악에 미친 자들이야!"


그런데 민제야, 도대체 살아있는기는 한 거니?

(2021.12.2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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