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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Dec 19. 2021

토익점수조차 없는 막막한 지방대 졸업을 앞두고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지방대생인데 현대자동차 다니고싶어' 의 글들은 회가 이어지는 연재 형식이 따르진 않습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글감이 생각날때마다 쓰는 형식이라서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셔도 됩니다. 타고난 글쟁이가 아닌 다소 투박하고 거친 공대생이 쓰는 글이라 그런것이고, 고민하며 글을 쓰지 못하고 미루는 습관보다 다듬어 지지 않고 구성이 다소 엉망이더라도 글을 일단 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함이오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나는야 공대 오빠

이참에 일타 강사나 해볼까?




미쳤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대학생활을 한게. 내 결국 이럴 줄 알았지. 4학년에 닥쳐서 현실을 자각해 버렸다.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곧잘 해서 공대를 선택했고, 학비가 싼 지방 국립대를 선택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4학년이 될 때까지 너무 막무가내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미 다져진 수학 실력으로 대학시절 내내 수학 과외를 하며 용돈벌이를 했다. 이대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과외비도 쏠쏠했고, 당시에는 그 돈이 참 크게도 느껴졌다. 그리고 과외가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진로였다. 학부모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잘리는 그런 일용직 노동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선택한 게 학원 강사였다. 프리랜서보다는 월급쟁이를 선택한 것이다. 근데 이거 웬걸. 과외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수학 강의를 하는 것도 재밌었지만, 그들이 지루할 때쯤에 동기부여를 해주고,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너무 보람찼다. 그런 재밌고 동기부여가 되는 이야기에 아이들의 똘망 똘망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가슴 벅차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렇게 매월 따박따박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현찰로 두둑이 월급을 받았다. 계좌 이체가 아닌 현찰이 주는 돈의 맛은 참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전까지 호텔 뷔페 알바도 해보고, 주차안내 알바도 해보았지만 확실히 시간 대비 고효율인 알바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름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고의 돈을 벌수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우쭐해했었다. 그렇게 대학시절 1,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으게 되니 세상을 다 얻은듯한 느낌이었다. 지금 나의 월급과 아파트 가격을 생각하면 1,000만원이라는 금액은 참 적은 돈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마음속 깊은 곳까지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흘러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주어진 시간보다 더 시간을 내서 강의를 해주고 개별학습도 해주었다. 그리고 일찍 출근해서 학원 전체를 청소해주고, 젊은 공대생답게 컴퓨터도 다 고쳐주고 그랬는데 월급은 매번 똑같았다. 원장이 그 수고를 알고 있었기에 중간중간 그 노고를 아낌없이 칭찬해주었지만, 그것도 잠시의 보람만 안겨줄 뿐 돌아오는 월급봉투의 무게는 그전달과 똑같았다. 나도 사람인지라 내 능력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관둘 생각으로 월급이 다른 강사에 비해 적다는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원장에게 하였다. 다른 강사들은 이미 전업으로 하고 있었고, 나는 학교를 졸업도 안 한 학생 강사였다는 사실은 나에게 더이상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저 억울한 감정이 앞섰다.



결국 다음달 월급이 10만원 인상되었다. 너무 기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딱 그만두지 않을 정도의 월급이라는 보상이 나를 계속해서 붙잡았고, 만족이란 걸 주진 못했다. 그렇게 몇 달을 더 지속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쪽 길은 아니다 싶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미 나의 동기들은 다들 취업이라는 큰 관문 앞에서 차곡차곡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고, 애초부터 취직이라는 것에 생각이 없었던 나는 막막한 현실 앞에 멘털이 나가기 일부 직전인 상태였다. 나 자신에게 후회와 복합적인 감정으로 우둑허니 서있는 나의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취업을 앞두고 내게 남은건...

무스펙 지방 공대생




진짜 큰일 났다. 토익점수도 없는 지방 공대생, 졸업을 앞두고 있는 4학년. '지난 20년 넘는 세월 동안 나에게 남은 건 고작 이것뿐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분명 내 인생에도 찬란한 때가 있었다. 분명 존재했다. 중학교 때 곧잘 공부를 하니 부모님께서 한의대를 가라고 하실 정도로 공부로는 전교권에도 들어가 보았던 터이다. 그런데 이게 뭐가. 현재의 결과가 중요한 이 현실. 내게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전교 석차 따윈 취직을 앞둔 스펙으로서 명함을 내밀수가 없는 허울 좋은 이력일 뿐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야! 그런거 다 필요 없고, 토익점수나 가져오라고!'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막상 진로를 강사에서 취직으로 선회하고 나니, 막막한 현실에 답답하기만 했다. 이미 학교 평점은 관리를 하지 않은 터에 플러스가 도배로 되어있었다. 비타민 B도 아닌, 비타민 C 플러스로. 그래도 괜찮다. 이건 어찌어찌 재수강하고 평점 세탁을 하기 위해 계절학기로 메우면 된다. 문제는 이거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서울 학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토익 만점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있어도 경쟁력이 있을까 말까 한게 현실이었다. 취업난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연일 기사는 쏟아지고 있었고, 동기들도 연일 낙방에 낙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뭐 하나라도 튀는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도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뭘 하려니 산떠미처럼 놓여있는 큰 숙제 앞에 짓눌려 한발자국도 나아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무기력해지기까지 하였다. 뭔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라도 들어야 시도를 하겠는데 말이다. 할 것은 많고, 어떤 숙제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 저서 무력감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머리로는 앞서 나가고 있는데 정작 내 몸은 방 안에서 붙박이 장처럼 붙어있었다. '도서관이라도 가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렇게만 허송세월을 보낼 수 없다. 한 계단씩 올라가 보자!'라고 읊조리며 다시 일어났다. 평점이라도 일단 갈아엎어 보자고 학기의 대부분의 과목을 재수강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 부족한 전공지식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가며 공부해 가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에서 폼나게 R&D 연구원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래서일까. 전공지식은 그저 시험 점수를 따는 용도로 습득하였고, 성적을 취득하는 순간 알코올처럼 내 머릿속에서는 기화될 예정이었다.



방학이 찾아왔지만 쉴 수가 없었다. 계절학기로 2과목만 신청 가능했다. 이 말인즉슨, 나의 비타민 C 플러스 성적들을 고칠 수 있는 과목이 방학 때는 2과목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재수강을 더했어야 했지만 신청과목의 한계로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남는 시간에 다른 스펙 쌓기가 필요했다. 그건 바로 토익점수였다.



영어. 내 인생 최대의 역적. 평생을 안고 가고, 평생을 귀신처럼 내 어깨에 들러붙은 채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온 숙제. 그리고 앞으로도 나를 계속해서 괴롭힐 존재.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염원. 그 이름하여 영어. 이렇게 나는 영어라는 바다에 푹 빠져 내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공부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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