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달랑 선풍기 한대가 웬 말이냐
감옥이다. 이게 진정한 정신병동 같은 감옥이다. 처음 접한 회사 사택을 본 나의 첫 느낌이었다. 나 같은 공대생은 보통 제조회사에 입사하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근무하지 않는다. 땅 가격이 싼 다소 외지에 위치한 곳에 공장들이 위치해 있고, 근처에 사택이 존재한다. 회사에서 주는 사택은 머나먼 고향을 떠나온 신입사원들에게 큰 복지혜택이다. 집을 따로 얻어서 월세 살이 한다고 생각해보라. 관리비며 월세며 월급이 줄줄 세는 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나는 자취방을 따로 얻는 것보다 돈을 모으기 위해 회사 사택을 선택했다. 회사 사택은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회사 사택 어떤 걸 선택할까?
회사는 나에게 두 가지 중 선택하라고 했다. 아파트에 살 것이냐, 기숙사에 살 것이냐. 아파트에 살면 월세는 없지만 각종 공과금을 스스로 내야 했다. 수도요금, 전기요금, 겨울 난방비 등등. 그런데 기숙사를 살게 되면 월 2~3만원에 모든 게 해결된다.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은 뻔했다. 돈을 모으려면 그나마 주거비용을 줄여야 했다. 기숙사를 선택하였다.
방키를 받았다. 무슨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70년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방키였다. 실제로 퇴근 후 기숙사의 문을 보는 순간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5~6평 정도나 되는 공간일까. 룸메이트와 함께 침대와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간에 끼이이익하는 방문 소리와 함께 찬란히 입장하였다. 나는 현재 21세기가 아닌 20세기의 한 역사적 공간에 있었다. 그만큼 낡고 오래된 곳이었다. 넓은 고시원에 입장하였다.
고향에서 가져온 침대 커버와 배게를 깔고 방청소를 하였다. 청소를 해도 깔끔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 그렇다. 화장실이 없었다. 방에 화장실이 없다? 이건 뭘까. 아 그래. 나는 기숙사를 선택했지. 넓은 복도로 이루어져 다닥다닥 붙어있는 기숙사 형태의 회사 사택은 공용 샤워실과 공용 화장실을 제공해 주었다. 순간 아파트를 선택하지 않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그래도 그만큼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위안이 있었다. 그래서 참았다.
문제는 한여름이었다. 전기세를 내가 쓴 만큼 내는 아파트가 아닌 기숙사였기에 에어컨을 다는 건 기숙사 원칙에 어긋났다. 그래서 선풍기로만 여름을 나야 했다. 어찌됐건 하루 종일 회사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집에서 잠잘 때만 어찌어찌 버티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맞바람으로 환기되는 공간이 아닌 창문 하나만 있는 공간에서 온실효과가 더해지니 생각보다 선풍기 한대로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너무 더운 날은 에어컨이 있는 공용 휴게실로 베개를 들고 가서 잤다. 모기가 물든 말든 상관 할바 아니었다. 일단 더워 죽을 것 같은데 모기 따윈.
모두가 흥청망청 즐기고 놀 때
동기들이 주말에 모두 놀러 가고 즐길 때 혼자 덩그러니 기숙사에 남았다. 그리고 공부를 하였다. 영어공부도 하고, 돈 공부도 하였다. 돈 공부라고 해봐야 어디에다가 예금을 들면 좋을지 찾아보는 정도였다. 27살이 사회 초년생이 경제에 대해 그리고 투자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돈을 얼마나 모았고, 가계부를 정리하였다. 지난 나의 카드 결제내역들을 뽑아서 엑셀로 정리하고, 계획한 거 대비 더 쓴 곳은 있는지, 덜 쓴 곳은 어딘지, 앞으로 더 아낄 말한 것은 있는지를 살펴보고 정리하였다. 월급은 정해져 있기에 1년 동안 모을 수 있는 돈을 계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소비만 잘 통제하면 그 목표 금액은 달성할 수 있었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냥 돈이 모여가는 걸 지켜보고 앞으로 얼마나 더 모을 수 있을지 계산기를 두들겨 보는 거 자체가 즐거웠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팬티만 달랑 차고 선풍기 한대에 의지하며 계산기를 연신 두들겨 댔다. 밥시간이 다가왔다가 방송이 나왔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하면 됐지만 주말에는 회사 급식소에서 5분 거리 되는 기숙사까지 배달을 해주었다. 이 또한 좋았다. 만약 주말에도 내 돈으로 밥을 사 먹으면 돈을 또 써야 하는데, 주말에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거의 최저 생계비보다 더 못한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부모님도 나의 이런 소비행태를 알고 있어서 인지 마음 아파했다. 그렇게 까지 궁색 맞게 살아야 하냐고 다그치셨다. 아들이 그렇게까지 사는 걸 바라는 부모는 없으리라. 하지만 정작 나는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고 즐거웠다. 아끼는 행위 자체가 좋았고, 돈 모으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회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도 내가 정리해온 엑셀 가계부를 열어보고, 지금 것 모은 금액의 숫자를 보면 모든 게 힐링이 되었다.
나의 하루하루와 주말은 그렇게 선풍기 한대와 가계부 작성으로 반복된 일상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