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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Jan 04. 2022

퇴사 후 정처 없이 방황하다

사춘기가 아니라 오춘기가 찾아오다


<오(五) 춘기>

내 멋대로 사전적 정의 : 사춘기 다음에 찾아오는 성인들의 방황하는 시기. 정신적 질환의 일환으로 약물적 치료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병의 일종.


2018년 대책 없이 퇴사한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1원. 그놈의 1원을 어떻게 벌어야 한다는 말인가. 월급 받을 때는 그 1원이 그렇게 하찮게 느껴지더니. 아니 하찮은 존재도 아니다. 1원이라는 단위를 들어보거나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나 자신에게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퇴사하기 전에는 그렇게나 자신만만하더니. 퇴사하고 나면 이렇게도 돈 벌 수 있고, 저렇게도 돈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은 나는 직장 안에서는 대리였을지 몰라도, 세상 밖에서는 신생아였다는 것이다. 아니, 태아상태일지도.




오춘기가 뭐야

퇴사 후 찾아온 지독한 정신적 방황



오춘기가 찾아와 버렸다. 사춘기 때 진작 고민해야 했어야 할 것들을 이제 결혼을 앞둔 다 큰 놈이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은 상당히 진지한 것들이었다. '내가 잘하는 게 뭐지?', '좋아하는 게 뭐지?', '내가 세상에 가치를 제공하고 돈을 벌 수 있을만한 게 뭐가 있지?', '나는 도대체 누구지?'.



하...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단 하나도 없었다. 큰일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나 고민했어야 할 진로를 이제와 서야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것일까?', '유년시절에 도대체 뭘 배운 것일까?', '대학 때 배운 공부들이, 회사에 있을 때 배운 것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구나'. 진정한 오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창피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 말도 못 한다. 철없이 답도 안 나오는 질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다들 이런 고민을 안고 살지만, 그냥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간다. 그게 어른이다. 그게 바로 어른이 보여야할 행동이다. 그냥 그렇게 다들 살아간다. 모르는바 아니다. 그런데 퇴사하고 나서 혼자 있고, 직장에 출근하지 않다 보니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많은 게 좋은 게 아니었다. 몽상가가 되어버린다. 안 좋은 생각은 더 안 좋은 생각으로 커진다. 이러다가 오춘기가 아니라 육춘기, 칠춘기까지 진화될 양상이다.



평생을 수동적으로 살아온 터였다. 그래. 1세부터 7세까지는 아직 뇌가 말랑 말랑한 상태니까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고등학교까지는 단 한 가지 만을 위해 살아왔다. 대학입시.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 6년, 중고등 6년. 도합 12년이 어찌 보면 수능시험 한방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대학과 전공을 선택한다. 나는 무슨 과를 선택했을까. 부모님이 취직이 잘되는 과를 추천해서 공대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단 몇 초 사이에 결정이 나버렸다.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색하리만큼이나 허망하고 순식간에 내 남은 인생의 진로까지 결정 나 버렸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남들이 내 삶을 대신 결정해주는 그런 패턴이.



내기준의 성인은 대학생이다. 술을 먹을수 있으니까. 그러면 성인이 된 대학생 때는 뭔가 상황이 달라졌을까. 전혀. 대학은 내가 선택한 과목에 대한 심화학습 기간이 아니었다. 회사 취직을 위한 중간 단계였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취직을 바라보며 대학 4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대학 생활을 보내니까. 그렇게 각종 스펙을 쌓아가며 대학생활을 보낸다. 그리고 회사를 선택한다. 진짜 회사를 내가 선택한 게 맞나? 아니다. 내가 회사를 선택해서 입사지원을 한게 아니다. 어떤 회사가 나를 선택해 줄지 모르니 입사 지원서를 낸것이다. 결국 회사가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을이었고, 인생의 선택권은 여전히 없었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지원을 했고, 그중에 나는 선택받았다. 나는 여전히 대학 전공을 부모님이 대신 결정해 줬듯이, 여전히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인이 되서도.




더 이상은...

내가 선택하는 주체적인 삶



이런 수동적인 삶에 평생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까. 회사 밖 세상은 이런 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1원을 거저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을 열심히 하든 열심히 하지 않던 월급이 똑같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회사 다닐 때는 억울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었으니. 그런데 지금 세상 밖에서는 그게 너무 절실했다. 일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왔으면 했다. 돈이 나왔으면 했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은 나에게 '너, 세상에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면 땡전 한 푼 없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아니, 외쳐대고 있었다.



평생을 남들이 결정해주는 삶에 익숙한 내가, 세상 밖에서 한순간 180도 바뀌기란 쉽지 않았다. 나의 몸뚱아리의 습관과 사고 습관은 세상과의 괴리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벌린 일이다. 이미 사직서는 제출했고, 인사과에서 수료는 했으며, 아주 멋갈나게 퇴사했다. 회사 인재였던 나를 놓치기 싫어 붙잡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아주 멋걸나게 박차고 나왔다. '키야, 그 용기 엄청 부럽다. 넌 성공할 거야!', '넌 역시 회사에 있을 체질이 아니야. 나가서 잘할 거라 의심치 않는다.' 이런 소리를 받고 의기양양 나왔다. 지 분수도 모른 체. 얼마나 철없고 어리석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미쳤지.



수영을 하기 전에 충분히 심장근처에 물을 묻히고 들어가야 한다. 체조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면서 몸을 어느 정도 워밍업 하고 물에 들어가야 한다. 바로 들어갔다가는 심장마비가 올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나는? 수영하기 전에 눈곱을 떼려고 고양이 세수 정도 했다. 심장에 물을 묻혔다고 생각했지만, 거기는 심장 위치도 아니었다. 엄지발가락 하나 정도 물이 차갑나 안 차갑나 담근 정도였다. 뭐 그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겠지. 나의 엄지발가락 하나 담그는 정도로 내가 수영해도 될 물인지 아닌지 판단은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겠지.



'첨벙'



그렇게 바로 입수를 해버렸다. 심장마비가 바로 찾아왔다. 엄지발가락으로 물의 온도를 체크했을 때는 '살짝 차가운 정도네?'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야. 완전 얼음장이었다. 내 엄지발가락은 굳은살로 인해 이미 둔한 감각 상태였고, 나의 야들야들한 유아기 속살은 그렇지 못했다. 바로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직장 안의 온화했던 그곳은 나의 안식처이자 평화를 선사했지만, 나의 면역계에는 그렇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직장생활 내내 그런 안전망 속에서 면역계도 약해져 있었는데, 세상밖에 나오자마자 바로 수영을 해버렸으니 몸과 정신에 이상반응이 오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살아야 했다. 헤엄쳐야 했다. 이미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에 들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지금 와서야 몸을 허우적 되며 몸을 데워야 하는수 밖에. 차가운 물에 맞서서 내 몸을 지금이라도 움직여 체온을 올려야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물에 가라앉아 죽기 전에, 얼어 죽을 판이다. 그렇게 나는 차가운 물속에서, 이미 퇴사해서 세상밖에 나온 상황에서 조금씩 헤엄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이미 얼어버린 온몸을 손가락 한마디 한 마디씩 조금씩 움직이며,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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