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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Jan 04. 2022

공무원 말곤 인생에 답이 없었다

이 학벌로 취직은 답이 없고, 결국...


"내 아내의 공무원 입성기"


2008학년도 수능시험 성적표 발표날. 시험볼때도 진작에 감은 있었다. 잘나올꺼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성적표를 받아보니 큰일났다. 진짜 망했다. 모의고사 성적보다도 못나왔다. 망했네. '이걸 어떻게 부모님을 보여드리지? 학교는 어딜갈수 있지? 엄마아빠한테 성적표 보여드리면 집에서 쫓겨나는거 아니야? 내가 재수를 할 수나 있을까?'



2011년 내나이 23살에 공무원 합격을 하고, 11년차에 접어들었다. 가끔식 생각해본다. 내가 공무원을 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취직이나 제대로 할수 있었을까? 대기업 다녔던 지금의 남편을 만날기회라도 얻게 되었을까? 아니, 결혼이나 제대로 할수 있었을까? 모든게 현실이다. 공무원이 되었기에 현실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린게 사실이다.




전문대를 가라고?

내 자존심에 전문대는 절대!



성적표를 받아보실 부모님 반응이 머리속에 생생히 그려졌다. 이걸 어쩌지? 방법이 없었다. 일단 거짓말을 할수 밖에.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완전 궁지에 몰려 성적표를 오픈해야하는 순간까지 다다랐다. 반응은 역시나 예상대로. 내가 다닌곳은 목동의 여자고등학교였고, 내신성적이 상위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쁜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서 일까? 부모님이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기대치 보다 높았나 보다. 성적표를 보고 나서 나는 집에서 쫓겨 나는줄 알았다. 노발대발. 재수는 안된단다. 우리집은 넉넉한 형편도 아니였고, 밑에 한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었기에 재수는 할 수 없었다.



성적표를 받아들인 상황도 기가막힌데, 아직 더 충격받을 일은 남아 있었다. 내가 받은 성적으로 지원 가능한 대학을 담임한테 상담받았더니, 경기도에 있는 들어보지 못한 대학을 추천해줬다. 나는 태어난 곳도 서울 자라온곳도 서울이었던 터라 경기도면 어디 시골인줄 알았다. 그런 철없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에 경기도 대학을 가라는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아빠는 그럴바엔 서울에 있는 전문대를 가란다. 전문대...뭐? 전문대...?! 그 시기에 나라에서 사회복지를 키운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신문기사에 관련 기사가 많이 나왔다. 그걸 본 아빠는 사회복지학과를 가라고 했다. 아빠는 거길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던 뭔가 관련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다. 으레 신문이나 뉴스의 소식을 믿고 따르는 그런 세대의 분이셨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듯 했다. 중학교때나 고등학교때도 딱히 하고 싶은게 있었던 아이는 아니었다. 꿈이 있었던 것도 더더욱 아니고. 전문대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알았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문대에 직접가서 등록금까지 냈다. 대학의 로망같은건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대한민국에서 4년제가 아닌 전문대의 인식은 좋지 않다. 나또한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학과에서 진행하는 오리엔테이션까지 기분좋게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는 인생의 패배자 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창피하다고 생각하는데...이런 학교에 내가 계속 다닐수 있을까?' 사실 답은 자명했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수능시험을 망쳤고, 그점수로 비싼 등록금을 내어가며 취직도 잘 되지 않는 지방의 대학교에 가는것보다 현실적으로 전문대학이 최선이었다. 그게 최선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같이 등교를 할만큼 내 마음의 크기가 크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에 다시 찾아서 등록금을 다시 돌려받고 입학 취소를 하였다. 그리고 노량진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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