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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둥바둥 김대리 Jan 06. 2022

퇴사 후 살기 위해 시작한 그것

내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일까?


백수. 퇴사 후 나는 정식으로 백수라는 명함을 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록 퇴사를 하였지만 여전히 나는 '저, 연봉 XXXX 받았었던 누구누구입니다.' 라며 과거 속에 갇혀 있었다. 회사 밖 세상에서 내가 그저 놈팡이, 백수로 비치는 게 싫었다.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기에 백수라는 명함보다 과거 회사 다닐 때의 명함으로 나를 증명하고 다녔다. '저는 정상적으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다녔었고, 사회에서 인정해주는 정식 월급쟁이였습니다.'라는 사실은 나에게 여전히 중요했다. 왜냐면 졸업 후 취직하고, 월급쟁이가 아닌 그 이외의 삶이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월급쟁이 이외의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이 차선으로 선택한 인생의 길이라 여겼다. 굉장히 오만하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건방진 생각이었다.




뭐라도 해보아야 하는데...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다



2018년 1월. 아무런 준비 없이 퇴사한 나의 하루는 무료했다. 눈뜨고 일어나 도서관으로 간다. 그리고 책을 집어 들고, 책을 읽는다. 그 생활의 반복. 아직 덜 절박한 거지. 아직 똥줄이 덜 타는 거지. 조선시대 한량처럼 그렇게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고,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렸다. 하지만 진짜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용기는 없었다. 그저 책이라는 공간 속 갇혀 헤엄치고 있었다.



'이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그 무렵 무언가 작게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밖 세상에서 나의 고민은 '1원을 어떻게 하면 벌 수 있을까?'였고, 그 첫 번째 발걸음으로 선택한 것이 네이버 블로그였다. 책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되면 광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을 따르기로 시작한 것이다. 초기 투자금이 드는 건 아니었고, 인터넷상에 글만 쓰면 되는 것이었다. 쉬워 보였다.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자고 있어도 블로그 글은 잠을 자지 않는다. 게다가 끊임없이 돈을 벌어다 준다. 시작도 하기 전에 배가 불러왔다.



하지만 나의 이상과는 다르게 첫 글을 게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으레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 글을 다른 사람이 본다고?! 그러다가 악플을 달면?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면? 그러다가 내 인생 종 치는 거 아니야?'. 글을 쓰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인플루언서급이었다. 혼자 머릿속으로 온갖 장밋빛 미래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영화화시키며 희망 회로와 절망 회로를 순차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됐다. 이래서는 1원을 벌 수가 없다.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아무런 글이나 쓰고 발행해버리자!



그렇게 책을 읽고 배운 내용을 글로 담았고 발행했다.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했고, 발행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은 마치 우주비행을 위해 로켓이 발사하는 것만큼 비장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의 첫 글이 발사를 한 순간이었다. 조용했다. 지극히 조용했다. 우주보다 더 고요했다. 그 어떤 누구도 나의 글을 보지 않았고, 아무도 나의 글에 관심이 없었다. 1시간, 2시간, 하루, 이틀이 지났다. 틈만 나면 누가 읽어나 봤을까 조회수를 보았지만 자릿수는 요지부동이었다. 유일하게 내가 이 글을 쏘아 올려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여자 친구가 클릭한 1 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세상은 나에게 1도 관심이 없다'



글을 발행하기 전에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마냥 생각했던 게 창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관심이 오히려 다행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첫 번째 글 발행을 통해 두려움과 마음의 벽은 허물어져 또 다른 글, 이어서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광고수익을 얻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았다. 광고를 나의 글에 게재하려면 네이버에서 요구하는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했고, 나는 한참을 못 미쳤다.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돈으로 측정되는 성과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돈을 벌려면 사람을 모아야 한다. 사람을 모으는 게 우선이고, 그 뒤에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네이버 카페에 '무료 영어 나눔'이라는 제목으로 게시글을 공지하였다.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다가 어느 순간 유료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세상에 내가 내놓을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고민을 치열하게 내린 끝에 나온 첫 사업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영어. 영어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 정도는 아니지만 그나마 남들보다 치열하게 공부를 한 터였다. 나름 노하우도 쌓였고, 꾸준히 영어 스터디도 운영을 하였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이거밖에 없는 게 자명했다. 회사에서 배운건 없었을까? 물론 있다. 엑셀과 파워포인트. 하지만 이걸로 밥 먹고 살 순 없었다. 그리고 5년간 회사에서 배운 게 고작 엑셀과 파워포인트라는 사실이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기에, 내가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가치 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연락이 왔다. 아파트 카페에 글을 올리고 며칠 동안 입주민들이 쪽지를 보내고, 문자를 보내고, 카톡을 보내고 댓글을 달고 연락을 주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공짜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진짜 영어를 배우고 싶은 것일까? 온갖 추측을 뒤로하고 밀려드는 수요에 대책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적당한 시점에 마감을 공지하였다. 그리고 단지 내에 있는 입주민 회의실에 모여 첫 나의 영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수익화할까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소서



퇴사 후 삶은 굉장히 척박한 환경이다. 내가 세상에 무언가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면 1원 한 푼 벌 수 없는 그런 곳. 그리고 그 가치가 인정받는 건 냉정하게도 돈이라는 금액으로 정량적 판단을 받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고민은 그 잘할 수 있는 것으로 돈을 벌겠다는 고민과 동음이의어이며,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는 와중에 자존감을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회사 다닐 때의 그 자신감은 점점 소진되어 어느덧 속 빈 강정 상태까지 이른다.



그렇게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작은 성공의 씨앗은 그다음 한 발을 디딜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아파트 입주민 상대로 시작한 무료 영어 나눔강의는 나에게 그런 작은 씨앗을 가져다주었다. 비록 무료였고, 돈을 받지 않았지만 낮아진 나의 자존감을 한 단계 올려주는 작은 성과였다. 게다가 무료로 봉사하는 나에게 식료품과 다른 형태의 보답을 해주는 입주민들을 보면, 현금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가치를 제공할 무언가가 나에겐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을 들어서 연락을 드립니다. 돈을 드릴 테니 저희 아들 영어 과외를 시켜주세요.', '강사님, 정식으로 저희 아파트 단지 내에서 유아상대로 영어강의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연달아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가진 그 무언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크게 느껴진 것일까? 내가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 그 무언가가, 어떤 이에게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걸까?



비로소 조금씩 깨달았다. 지독하리만큼 냉정하게 평가하고, 오히려 평가절하했던 나 자신이 가졌던 가치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게 큰 가치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그게 증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중학교 때 했던 리니지라는 게임이 생각이 났다. 캐릭터 레벨 한도가 50이었고, 나의 레벨은 10이었다. 레벨 10은 레벨 50이 잡을 수 있는 몬스터를 무찌를 수 없다. 레벨 10에게는 레벨 10이 상대할 몬스터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레벨 50이 되어 '나도 저 몬스터를 잡아야지!'라며 그들을 추종하고 희망을 가지며 게임을 이어간다. 때론 그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는다.



비록 나의 레벨이 10이지만, 그 이하의 레벨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나 또한 희망이자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벨 10이 될 수 있는 방법과 노하우는 레벨 10 이하의 사람에게 가치를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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