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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Jun 18. 2018

그놈의 '정'

정은 많지만 자선단체는 아니라서요

드라마 [김과장]에서 이런말이 나온다


한국은 유난히 '정 많은 사람들'이 많다. 어찌나 정이 넘치시는지 종종 정을 담보로 디자인이나 캘리그라피 작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정말 많다). 담보 잡힐 정이라도 없는 사람은 밥 한 끼로 디자인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거절 하면 '정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찝찝함에 하루 정도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뭔지도 잘 모르는 디자이너가 꿈이었는데 딱히 디자인과 관련된 어떤 것에 적성이 있었다기보다는 중학교 때 386컴퓨터가 각 가정에 보급되며 새롭게 떠오른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였고  직업이라면 쩍벌도 못하는 타이트한 치마를 입고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타는 일을  해도   같았다(어린 마음에 전문직은 차별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을거라 생각했나 보다). 


디자인을 한다는 건 단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만족' 보다는 '남의 만족'을 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작업을 의뢰하는 의뢰자 또한 그 작업에 대한 기획 의도와 니즈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와우~하고 스펙타클하게 해주세요" "화려하지만 심플하게요" "클래식하면서 감각적인 느낌으로요" "뭔가 부족한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같은 요구를 하면 사공이 많지 않아도 결과는 산으로 간다너의 와우를 내가 어찌 알겠으며 당신의 화려와 나의 화려는 느낌조차 다를 것이고 도대체 클래식모던스펙타클 같은 단어로 니가 바라는  내가 어떻게 파악하라는 걸까.


늘 그랬듯 '급하니까' 작업 기간은 "최대한 빠르게" 인데다 의뢰자가 이미 "간단한 거잖아요"라는 말로 주문을 시작한다. 그렇게 간단하면 니가 하면 될 것을. 아무튼 그렇게 작업이 시작된다. 보통은 디자인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이 디자인 비전공자이거나 하다못해 지인 중에 디자이너가 없는 사람들이라 디자인 비용에 대해 무지하다. 심지어 내 지인들 조차도 가볍게 부탁을 하려다 디자인 비용을 듣고선 사레 들리며 급하게 전화를 끊기도 한다. 본인이 의뢰하는 작업이 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면서 왜   십만원에 사레까지 들려가며 놀라는지 모르겠다.


디자인이 왜 정을 담보로 안되는 작업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놈의 디자인 비용을 한번 따져보자. 우선 작업이 시작되면 바로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를 켜는 게 아니라 구상, 즉 기획이 이루어진다. 생소한 작업이라면 '시장 조사'도 해야 한다. 

그런 구상의 과정을 거친 후 30만원짜리 2페이지 분량의 카탈로그를 3일동안 디자인한다고 치자. 2박 3일, 72시간 중 잠자는 시간, 이동 시간, 밥 먹는 시간 등등 개인적인 모든 시간을 넉넉하게 빼면 48시간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밥만 먹고 잠만 자고 급한 일만 처리한다 치면 현재 최저시급 7,530원으로 계산해도 361,440원이 나온다. (내년에는 무려 8,350원이 된다지?) 나는 최저시급만도 못한 금액으로 꼬박 48시간동안 '급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 위 금액은 순수한 나의 노동에 대한 비용이고 여기에 나의 디자인 아이디어 비용을 더해보자. 한 프로젝트당 보통 2~3가지 시안을 요구하는데 숫자만큼 배수로 계산하면 너무 정 없으니까 아까 계산한 ‘내 노동에 대한 최저시급의 대가’만큼을 아이디어 비용으로 책정해 보면 금액의 합계는 361,440 + 361,440 = 722,880원이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수정이 남았다. 수정은 새로 프로젝트를 엎지 않는 이상 순수한 노동으로 간주하고 시간당으로 계산한다. 수정을 4시간 했다고 치자. 4 X 7,530 = 30,120원이 된다. 이것을 더하면 총 금액 722,880 + 30,120 = 753,000원이다. 여기다 디자이너 개개인의 실력이나 경력 등의 대가도 더해야 하나, 아 너무 정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여기까지 계산하겠다. 


이렇게 금액으로 환산해보니, 내가 3일 동안 고생해서 벌 수 있는 최소한의 금액은 753,000원이 된다.(그런데 지인할인으로 30만원에 해준다) 이래도 정을 담보로혹은   끼에 디자인을 부탁하고 싶은가? 3 전단을 400 인쇄해도 20만원이 넘는다기계를  시간 남짓 돌리는 데에도 20만원이 넘는 비용이 발생하는데 어째서 디자인 비용을 깎으려 하는가


가장 놀라운 건 밥 한끼조차의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디자인을 ‘요구’한 사람이 제일 말이 많다는 것이다. "공짜로 부탁해서 이렇게 해준 거야?" "내가 맛있는 밥 한 끼 살게. 신경 좀 써줘~"라는 말로 공짜지만 공짜가 아닌것처럼 ‘클래식하고 감각적’으로 작업해 달라 당부한다. 그 말은 일을 의뢰한 본인도 공짜로 일을 맡겼으니 잘 해주지 않을 것 같은 찜찜함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당신의 중요한 디자인 작업을 그렇게 찜찜하게 완성하고 싶은지 나는 묻고 싶다.


얼마전 내가 본인과 친하다고 생각하시는 어딘가의 대표님께서 ‘멋있을 것 같아서’를 이유로 본인 회사의 서브 카피를 캘리그라피로 써주길 부탁하셨다. 물론 비용은 정으로. 그 외 본인 커플의 기념일에 만들 현수막 문구를 밥 한 끼에 써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간단하니까" 한 문장 써달라는 요구는 수도 없이 많았다. 

명함 인쇄비가 2만원인데 2만원에 '디자인' 해달라는 사람들, 프리마켓에서 5천원에 써주는 즉석 문구를 스캔해서 회사 로고를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작업을 해주면 2%가 부족한데 그게 뭔지 모르니 해결해 달라는 사람들.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거나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일은 부탁하기 전에 주로 해주는 편이다. 그리고 다수에게 도움이 되거나 공익적인 이유로는 얼마든지 무료 작업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개인의 만족을 위한 '멋있을 것 같아서' 같은 이유에는 크게 반응하고 싶지 않다. 단지 사회적으로 약간이라도 지위가 있으신 분들의 부탁은 들어주는  우리 사회에서는 ' 있는사람으로 분류되는  같아서 거절하는 마음이 항상 찜찜할 .


나는 진심으로, 이제 디자인 작업을 의뢰하는 사람이 적어도 ‘디자인’을 밥 한끼나 정을 담보로 평가절하하여 대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정 따위를 담보로 요구하지 말기를 바란다. 더불어 무언가를 의뢰할 때에는 스펙타클, 판타스틱 같은 단어를 쓰지말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기를 바란다. 정 없다는 소리까지 들으며 거절하는 순간이 많아지면 정말로 그들과 나 사이에 남은 정이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아도르캘리그라피

블로그 http://blog.naver.com/jwhj0048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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