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37
한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찾아왔다. 그 사람의 시험은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길 어느 시점에 이루어졌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야 하는데, 예수는 먼저 사람들을 보내어 길을 내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 청을 거절당한 후였다. 그 후에 일흔 명의 사람을 미리 보내어 그가 지나고자 하는 마을의 평안을 빌게 하였고, 바로 그때 이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학자답게 대단히 종교적인 질문으로 시험의 첫 운을 뗀다. 시험의 시점만큼이나 질문의 내용도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은 칠십 명의 보통 사람들이 돌아와 그들의 성공적 방문기를 알리고 예수의 칭찬과 사람들의 기쁨이 고조되었을 때, 찬물을 끼얹듯 남자가 한 마디 내뱉는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과 영생을 얻는 것, 이 두 가지 사안을 연결시키기 위해 예수가 이 남자에게서 끌어낸 낱말은 '이웃'이다. 율법학자가 정의하는 이웃과 예수가 이야기하는 이웃에서 낱말의 온도가 달리 느껴진다. 학자적 면모를 십분 발휘한 남자는 대단히 객관적인 태도와 어투로 묻는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율법이 정한 이웃의 경계가 있고 그 답을 예수에게서 유도해내고자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율법적 판단 내에서는 예수의 여정을 거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결코 이웃의 범주에 들일 수 없다. 오죽하면 야고보와 요한마저 그들을 저주하였을까.
이 이야기의 반전은 율법학자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되어주어라"가 아니다. 예수의 비유는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네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라고 결론짓는다.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자신의 율법적 지식으로 인해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율법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온 사마리아인은 어떤 구속이나 경계심 없이 그의 필요를 도울 수 있었다. 율법학자가 수도 없이 되뇌었던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그에게는 이웃을 정의하고 구별하는 해석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이고 기쁨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도 가서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는 예수의 권고에 언짢았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사마리아인과 동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에게도 그런 사마리안이 여럿 있다. 나만의 도덕적, 사회적 기준으로 절대 내 이웃의 범주에 끼워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기도 중에 그런 사람들이 떠오를 때면 참 많이 괴롭다. 입으로는 사랑을 구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사랑이 흘러나오질 않는다. 차라리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그를 벌하여 주시기를 바랄 때 평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문득 율법학자에게 던진 예수의 이 질문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물을 찾는 그분께 물을 내어 주었고, 그 보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병을 치유받고 예수에게로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유일한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구원이 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