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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an 04. 2022

부유한 주인

누가복음 16:1-13

갈릴리를 떠나면서 시작된 예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의 이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비유로 이어지던 이 여정의 끝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오르기 전 여리고의 이방인 이웃을 직접 부르고 소개한다.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의 삭개오라는 이름과 공명하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 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난다. 예수와 제자들의 마지막 여행길에 몇 가지 비유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누가는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 행간에 연관의 장치들을 숨겨 두었고, 그 단서를 찾기 위해 나는 텍스트 사이로 난 길을 수없이 헤매야만 했다.   


삭개오는 독립된 비유들의 연관을 드러내 보인 첫 실존 인물이다. 그는 『불의하지만 칭찬받은 청지기 이야기』 밖으로 튀어나온 주인공이었다. 그저 약아빠진 이 세대의 캐릭터에 갇혀 버릴 수 있었던 청지기는 삭개오의 용감한 행동으로 반전의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현실의 청지기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의한 삶을 청산하고 예수의 뜻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제자도 이해하지 못했던 스승의 비유를 삭개오는 단번에 행동으로 옮겨 버렸다. 하지만 그의 이 무모한 행동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은 이야기 속 청지기를 비웃듯 그를 조롱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물을 나누고 혹여 불법적으로 거둬들인 이익이 있으면 정산하여 그 이상을 돌려준 이 성실한 청지기의 이미지를 그들은 예수의 비유로부터 연상했어야 한다. 상상조차 못한 이야기의 실체가 그들 눈앞에 나타났을 때, 너무도 분명한 목소리로 삭개오라는 이름 자가 불릴 때마저, 그들은 예수를 비난했다. 예수가 불렀던 그 이름이 그들이 정한 이웃의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향하던 사마리아인만큼 이 여리고 사람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경계 밖의 존재였다. 


불의한 청지기를 비웃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주목한 것은, 주인의 뜻이 아니라 잃어버린 재물이었다. 적어도 그 청지기는 큰 부자였던 주인의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인과 채무관계에 있던 소작농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도박을 감행한다. 빚을 탕감받은 자들에게 그는 이웃이 되었고, 주인의 집에서 일자리를 잃은 후에도 그 이웃들의 도움으로 살아갈 길을 마련한 것이다. 이야기 속 청지기는 분명 주인에게 불성실하였다. 바리새인과 제자들의 사고 속에 있는 주인이라면 마땅히 그를 심판해야 한다. 결코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주인은 그를 칭찬하였고, 이 터무니없는 판결에 나 역시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주인은 선하지만, 불의한 행동을 처리하는 그의 방식은 적잖이 불편했다. 여리고의 삭개오에게로 향한 예수의 말과 뜻이 바리새인들에게 불편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의 관심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는 데 있지만, 정작 그 과정에 잃어야 할 것들이 두렵고 아쉬운 이들에게 주인의 판결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내가 주인이라면 저런 어리석고 불공정한 판결을 내리진 않을 거야.’ 성실하지 못한 관리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나 오늘의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는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이 짧은 이야기의 결론으로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하신 것이다. 


나와 바리새인에게 관리인은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렇게 정해 놓은 삭개오의 이미지를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단번에 뒤바꿔 놓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삭개오의 구원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고친 이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예수가 그를 부른 순간, 삭개오는 놀라운 은혜와 기쁨에 휩싸였다. 경계를 허물고 그를 찾아온 예수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심지어 주인의 크고 자비로운 마음에 기댄 관리인의 약은 행동마저도 예수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웃이 되어주고 이웃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 재정적 손실도 기꺼이 감수한 주인처럼, 예수는 불의한 관리인과 빚진 자들과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비웃은 바리새인 모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그리고 관리인! 그는 자신의 얕은 속임수에 기꺼이 희생양이 되어 주고도 유쾌하게 자신을 칭찬한 주인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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