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령 이야기 2 *그림 권혜성
진료 준비를 위해 급히 문을 여니 두 분의 할머니가 계신다. 오후엔 물질을 나서야 해서 사역팀이 도착하기도 전에 마을회관을 찾으셨다. 우리도, 할머니도, 당황하여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공간과 동선을 정비하는 사이, 두 분은 말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되돌아가셨다.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들에게서 느꼈던 묵직한 외로움은 바다로 내리는 해녀의 몸에 매달린 납덩이같은 것이었다. 물에선 전복이나 문어처럼 값비싼 식재료를 캐내고 뭍에선 달달한 감귤을 수확하니 해녀의 생계가 넉넉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는 않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태백에서 출발해 진도, 울릉도를 돌아 제주까지 내려오는 지난 10년간, 선교현장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외지인의 방문에 열정적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사역 장소 입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주민들로 언제나 소란스러웠고, 떠나올 때면 아쉬운 마음에 두 손 가득 먹거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곳 제주의 첫인상은 사뭇 다르다. 한 동네 분일 텐데 따로 진료소를 방문하시는가 하면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여느 할머니들의 수다를 엿들을 순 없었다.
제주 월령은 선인장 군락지로 유명하다. 뜨거운 사막의 모래바람이 아닌 바닷바람에 자생하고 있는 선인장들이 신기하여 유심히 들여다보니 다홍빛 초콜릿으로 익숙한 백년초들이다. 초콜릿의 달콤한 맛 이면에는 가시의 독소가 숨어 있었다. 검은 돌담 틈 사이로 수북하게 오른 백년초 가시들이 월령의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지만, 자칫 이방인의 신체 한 면이 잠깐이라도 스칠 때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월령의 선인장은 이 마을의 쓸쓸한 고요함과 닮았다.
굵은 마디의 손가락, 선명한 멍자국, 적지 않은 나이에도 할머니들은 여전히 물질을 나선다. 우리가 머문 이틀 내내 월령 하늘은 맑았다. 물질하기에 좋은 날씨였고 그만큼 진료소를 찾는 할머니는 적었다. 오십 넘은 아들은 노모의 병이 억척스러운 제주 생활이 지운 멍에라 여겼다. 아들의 눈에는 일하는 아버지들은 없었다. 아내가 무거운 납을 채운 채 바다로 뛰어드는 동안 남편은 술을 마신다 했다. 남편은 술을, 아내는 바다를 헤어 나오지 못해 죽는다. 어린 아들에게 제주의 바람은 매일 슬프게 울리는 장송곡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