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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Dec 15. 2022

파편들의 꿈

아상블라주 캐슬  *그림 권혜성

유리 백조가 장식장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타이거, 래빗, 플라밍고 등을 실은 유리 방주가 가득 찼지만 외롭고 쓸쓸한 백조 한 마리에게 내어줄 공간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어린 화가는 건축가의 짐 가방 속에 함께 실려올 크리스털 친구들을 기다리며 현관문이 열리고 구두 소리가 멈추는 순간을 언제나 설레어했다. 코발트 빛 종이 상자에 담긴 이 빛나는 생명체를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장식장으로 옮기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은 흡사 진귀한 보물을 다루는 고고학자만큼 진중하다. 작고 뽀얀 두 손으로 자리를 정돈하고 백조의 위치를 잡는데, 반대편 스피커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합창곡이 흘러나온다. 웅장한 곡조는 투명하게 빛나는 백조의 외관과 달리 암울하고 슬펐다.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건축가는 로엔그린의 옛이야기를 바그너의 선율을 따라 들려준다. 


마리엔 다리 옆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오르니 화가가 그토록 아끼던 유리 백조가 우아하게 언덕 위에 섰다. 촘촘히 언덕을 감싼 숲엔 소복이 눈이 내렸고 햇살에 번진 눈꽃의 광채에 새하얀 석회 벽은 투명한 얼음조각인 듯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매직 아일랜드에 옮겨 둔 가짜 성에 익숙해져 망각하고 있던 로엔그린의 서사와 선율을 선명하게 떠올릴 만큼 환상은 강렬했다.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의 마지막 소리가 눈이 부시게 황홀한 설경 사이로 울릴 것만 같아 지그시 두 눈을 감아본다. 순백의 숲을 뒤덮는 미세한 공명이 수천의 얼음 파편들을 스치고 지나가며 소녀 시절 열 손가락으로 익혔던 아름다운 오페라 한 소절을 읊조리게 한다. 수줍은 화가의 노랫소리에 응답하듯 우아하고 애달픈 노이슈반슈타인은 아직도 로엔그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속삭인다. 마법이 깨지는 순간 로엔그린도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이 거대한 아상블라주는 화가의 깨진 꿈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다시 마법의 시간으로 되돌리려는 내면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문득 알프스의 겨울바람에 손끝이 시려오고 화가는 건축가의 이야기 소리에 안겨 가만히 쓸어내리던 유리 백조의 표면을 떠올린다. 정교하게 컷팅된 차가운 유리면의 감각이 현실에 안주해 있는 화가를 꼬집는 것만 같다.  


동화는 유년 시절 화가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꼭 글자가 아니어도 그림만으로도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책방을 좋아한다. 문자 그대로 책이 있는 방, 그런 공간이 화가의 그림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더 단단한 붓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빽빽한 문자들의 행간에서 백조가 왕자로 변하는 마법을 불러내고, 레다의 품으로 무자비하게 내려앉은 백조의 욕망을 그녀답게 그려냈을 것이다. 혹은 슈방가우의 절벽 위로 내린 하얀 눈이 문자들의 눈송이가 되어 종이 위에 흩뿌리는 환상을 들려줄 수도 있다. 그렇게 흩날려 이룬 문자의 숲은 한 권의 책이 되고 새하얀 백조 형상의 서고를 채울 동화 한 편이 완성된다. 전설의 기사가 돌아오면 그 옛날 건축가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백조의 성에서 화가는 제대로 마법에 걸려들었다. 


건축가의 노이슈반슈타인은 어김없이 건축가다웠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을 화가는 과감하게 상상의 유리 백조로 변환시켰다. 어찌 보면 화가로서는 슈방가우에서의 환상을 '사실적으로' 옮긴 것이다. 더 이상 화가는 사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다. 깨진 백조의 꿈을 그러모아 도리어 현실이 되지 못한 꿈을 반복된 일상으로 재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손끝의 각성에 따라 단조로운 일상의 리듬에서 다른 인상, 다른 의미를 찾으려 화가의 마른 붓을 잉크에 적시면 그렇게 그려진 하루는 낯선 여행과도 같다. 고생스럽게 뮌헨 공항이나 퓌센 역 인파에 쓸려 다닐 일도 없다. 


하루는 작업실 창가에 앉아 피고 지는 목련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은빛 털옷을 벗고 우아한 날개를 펼친 백목련 향기가 세잔의 프로방스로 화가를 이끌었다. 손엔 릴케의 서간집 한 권이 들려 있을 예정이다. 먼저 화가는 시인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조금 큰 규모의 서고를 찾는다. 유리 표면이 인상적인 공립도서관 5층에는 화가가 즐겨 찾는 붉은 의자가 햇살 좋은 창가를 등지고 앉아 있다. 그 익숙한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빛나는 유리창 앞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두 손에는 편지가 들렸다. 아마도 클라라 릴케가 남편에게서 갓 도착한 소식을 읽는 중인가 보다. 그녀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서가에서 오월의 초록빛을 머금은 권을 꺼내 들어 붉은색 의자에 가만히 앉는다. 책장을 펼치면 활자의 배열은 세잔의 걸음이 되어 아침나절 내내 사생하던 목련을 별다르게 보는 시점으로 화가를 안내한다. 서고에서 만난 프로방스의 환영이 현실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어릴 적 로엔그린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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