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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Dec 07. 2022

오르트 구름에서 온 혜성

돌아온 이름  *그림 권혜성

가을밤, 경복궁 검은 기와 아래로 붉고 푸른 속살이 드러난다. 한낮의 궁궐은 현판에 새긴 이름들로 인해 어딘가 모르게 근엄하고 권위적이다. 그래서 건축가는 궁궐의 중심이 아닌 후원을 스케치 장소로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피사체를 찾는 그의 시선이 왕의 공적 집무실이 아니라 사적 공간인 뒤뜰로 향한 것도 이해가 간다. 오랜 세월 가족과의 시간을 뒤로하고 해외를 돌며 일에 몰두했던 건축가에게 구중심처인 후원은 개인적인 회환과 그리움이 중첩되는 공간이었을 테다. 긴 회랑과 여러 문을 지나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옛 가장처럼 그도 기나긴 비행 끝에야 아내와 세 아이의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너무 먼 거리를 헤어져있는 동안 그리움은 어색함으로 바뀌고 더 이상 가장의 귀환이 자연스럽지도 설레지도 않게 되었을 때, 그는 가족 안에서마저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지구 몇 바퀴를 돌아온 세월만큼 건축가의 후원은 깊은 쓸쓸함을 내뿜는다. 그 정체 모를 기운에 이끌려 화가는 밤의 궁궐을 찾았다. 밤이면 궁궐의 내밀한 속사정도 엿볼 수 있을 텐데, 북궐도형 가장 깊은 곳에 배치한 후원만큼 그런 서사가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후원으로 진입하는 길, 함화당과 집경당이 나란히 늘어선 담벼락에 기대어 건축가의 그림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아직도 그 쓸모를 알지 못하는 옛 전각의 비밀처럼 말 못 한 가장의 사정을 애써 유추해 보는 것은 풍경 그림에 자그마하게 그려 넣은 한 남성의 모습 때문이다. 비가 개이고 북악산 바위는 아직 습기를 머금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 하늘색 우산을 펴 들고서 후원 진입구를 빠져나오는 그의 걸음이 조급해 보인다. 화가의 유년 시절, 건축가는 늘 그렇게 바삐 걸었다. 아이의 걸음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그림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우산으로 가린 남성의 얼굴처럼 가장의 얼굴도 언제나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림의 쓸쓸함을 간직한 채 화가는 후원으로 들어선다. 가을 달빛에 더욱 깊어진 처마선의 그림자는 웅장하게 날아오르던 붕의 날개를 접어 다시 북쪽 바다 곤으로 되돌아왔다던 옛 전설을 상기시킨다. 외등조차 없는 후원의 적막함을 달래주는 별 하나가 검은 처마들 사이에 앉았다. '아버지에게 나는 저런 별이었나?‘ 화가는 오래전 자신의 이름에 별 하나를 새겨 둔 건축가의 답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기를 존재하게 했던 그 특별한 기호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해 그림자에 가렸던 빛바랜 단청이 밤이 되자 극단의 색조로 말할 수 없이 화려한 자태를 펼쳐 보인다. 낮에는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리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시절 화가는 화려하지만 기계적인 단청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서나 반복되는 패턴 그리고 창작이라 할 것 없는 도제적 노동이 영감적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치부했던 탓이다. 하지만 자카르타 Cemara 6 갤러리의 하얀 벽체 위를 수놓은 화가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그 지루한 문양에 상상의 원천을 두고 있었다. 셰에라자드의 입에서 풀려나온 듯한 바틱 무늬가 도도했던 이방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소리로 이야기를 잇듯 화가는 섬세한 옷감 속에 엮인 자카르타 이야기를 전설의 왕비처럼 그려냈다. 그 특별하고도 이국적인 경험 이후 화가의 눈엔 장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무의미한 단청들이 어느새 그림의 주요한 모티프가 되어 있었다. 밤 조명에 드러난 단청의 빛깔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그 신비한 아름다움은 푸르고 붉은 안료를 덧입히기 전 초칠한 나무 위로 찍어낸 백색분 점선화에서 시작된다. 옛 화공은 건물의 크기와 형태와 목적에 맞는 문양을 정교하게 디자인하여 건축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다. 초지의 검은 선화는 질서 있게 움직이는 화공의 손놀림을 따라 빳빳한 종이를 뚫고 건물에 온갖 꽃자리를 그려내는데,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와도 같았다. 미세하게 뚫린 초지 위를 반복해서 두드리는 그 밋밋한 소리 뒤에 연꽃, 모란, 국화가 비밀스럽게 새겨지고 있었다. 타분하여 희미하게 떠오른 문양이 바람에 씻겨나기 전 화공은 조심스레 한 가지씩 색을 더한다. 그렇게 매혹적인 옷을 덧입혀 목조 건물의 속살을 가렸던 것이다.


순간 이름 모를 옛 화공의 섬세한 손길이 별을 지닌 화가의 이름을 스치듯 두드린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름자의 점선이 단청 빛에 매료되어 흘러가는 화가의 시선을 멈춰 세웠다. 시공을 초월한 환상소설의 한 페이지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글줄은 혜성이 오르트 구름에서 온 신비한 존재라고만 알려주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광대한 태양계 그 너머의 공간을 헤매다 찾아온 이 작은 별이 자신의 동류였다는 비밀을 알게 된 화가는 서둘러 후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작업실로 향했다. 태블릿 화면을 키워 구부정하게 우산을 들고 걷는 그 남자의 뒤를 밟는다. 건축가의 보폭이었다. 어렵게 대학을 왔고 그래서 지독하게 성실해야만 했던 트미실의 청년은, 옛 궁궐의 정취를 여유롭게 즐기러 온 여행자들의 행렬을 피해 조용하고 신속하게 건축학도의 일을 마치고 궁을 빠져나와 학교로 돌아갔다. 이후 단청의 색감은 배제하고 오로지 무채색의 선화로만 기억하는 궁궐에 제 색을 찾아주기까지 긴 시간을 돌아와야 했던 건축가는 지루하고 특징 없는 회색도면에 피로해질 때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바로 그때 화가의 이름도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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