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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Nov 26. 2022

트미실 잠실

고향의 샘  *그림 권혜성

"아빠! 순영이가 우물에 빠졌어!"

다섯 살 아이는 잔뜩 겁에 질려 다급하게 외친다. 한 살 터울의 삼촌과 물방개 채집에 열중한 나머지 미끄러운 땅을 조심성 없이 내딛다 순영은 트미실 검은 샘 속으로 빨려 들었다. 허우적대는 아이의 두 발과 두 손 사이를 유영하며 물방개 여럿이 장난을 친다. 물속에서야 짖꿎은 술래에게 잡힐 일 없으니 대담하게 제 몸을 드러내는 것이다. 순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작고 검은 방해꾼들을 헤치고 샘 위로 오르려 하지만 그럴수록 샘 아래서 더 강한 손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바다 깊은 곳에 산다는 나가 파도하-인도네시아 속 바다 용-의 손이었을까. 밀려드는 두려움에 애써 뜨고 있던 눈을 감으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엔 작은 물방개 대신 크고 노란 오리 한 마리가 떠 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계속 자라 이 낯선 호수까지 떠밀려 온 걸까. 순영은 동화로만 알았던 새끼 오리의 거대한 등을 힘껏 타고 오른다. 미끄럽고 두툼한 오리 목을 의지해 겨우 눈을 돌려 보니 호숫가 한 편에 마을 교회 종탑보다 높은 탑 하나가 한낮의 빛을 받아 반짝인다. 베틀 모양의 산 골짜기라 이름 붙은 트미실의 낮은 초가집과 작은 못이 세계의 전부였던 시골 아이의 두 눈엔 그저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롭기만 하다. 잠시 두 손을 뻗어 멀리 우뚝 솟은 은빛 탑에 닿아보려는 순간 일꾼 조 씨가 내린 장대가 네 살 난 순영을 잠잠해진 물 위로 건져 올린다.


트미실의 우물에서 다시 태어난 건축가는 아내와 딸과 손자와 함께 잠실의 호숫가를 걸으며 초고층 타워가 뿜어내는 과시적 야경을 즐긴다. 아내는 며칠 전에도 555m 타워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손자들이 어릴 때에는 롯데월드가 가장 큰 놀이터였는데, 점점 놀이의 공간이 수직으로 뻗어가고 있으니 바벨의 공사는 성서 속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화가에게도 잠실은 건축가의 트미실과 같은 고향이면서 동시에 바벨이었다. 소통할 수 없는 바벨의 언어는 소란스럽고도 적막한 도시의 언어와 닮았다. 가족도 친구도 각기 자기 말하기에만 신경을 곤두 세울 뿐 서로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같은 언어를 쓰지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바벨의 도시에서 어린 화가는 언어 대신 그림으로 말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많은 시간 대화의 상대는 그녀 자신이었다.


자카르타의 작업실에는 다양한 기법의 자화상이 늘어갔고 그렇게 캔버스에 비추어 낸 화가의 얼굴은 밤의 잠실을 닮아 있었다. 웅장한 빌딩이 내뿜는 빛의 어스름이 검은 호수 위로 일렁거리듯 그녀는 마주 앉은 캔버스 위를 불안하게 헤매고 다녔을 테다. 이질적 풍경들 사이에 늘어선 화가의 얼굴은 현지 기자 Carla Bianpoen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은 크게 문제 될 것 없었다. 초현실적 형체와 상징들이 비평가의 언어로 만족스럽게 번역되었을 때 화가는 그림으로 바벨의 저주를 풀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증명할 순 없지만 그때 자카르타 독립 광장을 걸으며 보았던 순백의 모나스가 멀지 않은 미래의 바벨 타워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암호를 주고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화가는 다시 빈 캔버스와 마주한다. 캔버스 위에는 두 장의 메모가 걸려 있다. 건축가가 보내온 스케치의 제목과 설명을 깨알 같은 글씨로 요약해 두었다.


Lotte World Tower: 한국의 랜드마크. 555m 123층. 대나무가 마디를 틀며 가늘고 높게 올라가는 것과 같은 공법을 사용함. 엄청난 기초와 꼭대기 층의 대형 물탱크가 태풍과 지진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함. 손주와 함께 즐거운 추억을 나눈 곳.

고향: 내 고향 트미실. 인근에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트미실은 옛 모습 그대로임. 네 살 적 우물에 빠져 죽을 뻔함. 그래도 그리운 내 고향.


건축가의 트미실과 잠실을 화가의 언어로 옮겨 볼 참이다. 자카르타의 신비한 교감이 갖가지 재료들로 둘러싸인 5평 남짓한 화가의 공간으로 다시 신호를 보내오길 기다린다. 트미실. 잠실. 각운을 맞춘 건축가와 화가의 고향은 모두 물 위에 세워졌다. 오래전 홍수로 한강의 물길이 바뀌어 생긴 잠실이라는 섬의 흔적이 익살스러운 러버덕의 휴양지 석촌호수였고, 트미실 주위론 샘이 많아 지금도 적지 않은 저수지에서 마을의 논밭에 물을 댄다. 건축가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뛰놀았을 기지제는 베틀 모양의 연못이라는 뜻을 지녔다. 장대에 매달려 올라온 아버지의 시간을 되감아 다시 잇는 화가의 붓끝이 접시 위 푸른 물감 위에 닿는다. 그러면 딸은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메모 속 문자들이 지시하는 안내선을 따라 트미실, 상상의 그 샘으로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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