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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Dec 23. 2022

지바와 마리아

297번의 종소리  *그림 루벤스의 성모승천

오늘도 건축가는 석촌호수가를 걷는다. 가족, 친구들과 함께 하던 산책로에 회사 동료들을 초대했다. 연분홍 벚꽃 만발한 호수길을 걸을 때면 이곳에 집을 마련한 것이 여간 뿌듯한 게 아니었다. 마치 건축가의 개인 정원인 양 어깨를 들먹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시선은 벚꽃 향기 아른거리는 호수 한가운데로 향해 있다. 마법의 섬에 옮겨 세운 백조의 성이 잔잔한 물 위로 떠 다니는 꽃잎들과 함께 춤을 춘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로엔그린의 이별곡에 건축가는 한 얼굴을 떠올린다. 얼마 전 세상 떠난 오랜 동료의 얼굴이다. 최고가의 건강 검진을 받고 와서 아무 이상 없다던 친구였다. 딸아이에게 값비싼 선물을 받은 그가 부러워 자식들에게 닿지 않을 투정을 마음속으로만 쏟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친구는 떠났다. 친구의 자랑에 시새움 낸 그때가 떠올라 미안하고, 몇 차례 수술 후 쇠약해져 버린 육신을 생각하며 친구를 그린다. 석촌 호수의 밤과 낮, 봄꽃과 눈꽃을 그곳에서도 그리워할까. 누군가는 그리움이 그림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건축가는 아픈 몸을 이겨내며 쉼 없이 그리운 것들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란스러운 봄의 호수를 그리는 붓에는 철없었던 질투와 짙은 그리움이 묻어 있다. 한 획 한 획, 건축가는 친구와 맞추었던 걸음을 캔버스 위에 새긴다. 


유일한 섬,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 중앙에 외로이 떠있는 작은 섬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오늘도 누군가 간절한 소원을 담아 성당의 종을 울리나 보다. 잔잔한 호수 바람을 따라 들려오는 그 소리에 화가는 자신의 나이만큼 오래된 얼굴을 떠올린다. 얼마간 잊고 지냈고 특별히 마음을 써 기억할 일도 없었다. 건축가도 화가도 자기의 일에 매진해 있는 동안은 그것이 편했다. 건축가의 해외 파견이 줄어들고 더 이상 현장에 나갈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되어서야 자주 벨이 울렸고, 발신처는 병원이었다. 처음엔 걱정이 앞섰으나 반복되는 전화에 화가는 지쳐갔다. 어쩌면 서로가 낯설었던 때가 호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민과 부담의 양가감정이 수시로 들끓었고 그 때문에 화가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먼 이국땅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런 도피가 아니었으면 <사비차의 세례 The Baptism at the Savica>는 평생 낯선 이방 시인의 뜻 모를 작품으로 무관심하게 지나쳤을 것이다. 류블랴나 구시가 광장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청동의 남자는 슬로베니아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이었고, 이미지로 새겨놓은 그의 서사에 이끌려 작고 신비로운 블레드 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화가는 작은 배를 빌리고 직접 노를 저어 섬에 내렸다. 섬의 경계에서 시작되는 아흔아홉 개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오르면서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된 긴 서사시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청취한다. 섬은 처음부터 성모의 섬이 아니었다. 성당이 세워지기 오래전 사원의 주인은 블레드의 모신母神 지바였다. 비잔틴 시대에 이 고요하고 한가로운 섬에도 그리스도교가 전해졌고, 벽감 속 지바가 낯선 성모의 얼굴로 변형되었을 때 주민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을 것이다. 신들의 전쟁에 인간이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고, 프레셰렌은 그렇게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갈등을 한 편의 서사시로 그려냈다. 땀과 습기, 신화적 은유와 상징에 흠뻑 젖은 화가는 성당의 황금빛 제단 앞에서 형상들의 환영을 본다. 발걸음이 성모와 성자, 아기 천사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극한의 대립으로 맞섰던 두 여인의 얼굴이 하나의 상을 이루는 것이다. 지바와 마리아는 서로의 길을 존중하기로 했다. 오른쪽 벽면의 격자형 유리창을 통해 평화의 제단을 비추는 빛이 은혜로이 비춰든다. 그림자조차 삼킬 것 같은 화려함으로 제단을 입혔지만 고요하게 내리는 새하얀 빛 아래 색의 소란스러움도 잠잠해진다. 다시 울리는 세 번의 종소리에 화가도 가만히 평화의 기도를 얹는다. 


지바와 성모의 화해를 이루어낸 여사제 보고밀라 Bogomila는 평화를 증오했던 한 남자 츠르토미르Crtomir를 사랑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정이 시인의 말들로 다투고 있고, 화가도 그런 내적 갈등으로 가족에게서 멀리 달아나 이곳에 있다. 기도를 마치고 충돌하는 마음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섬을 둘러본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수 해 전 건축가의 전시에서 보았던 풍경이 화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언제부터인가 건축가의 그림에는 설경이 많아졌다. 화려한 봄꽃도, 풍요로운 가을 과실도, 지나간 시간들을 하얗게 덮어버린 눈보다 매력적이진 않아서였다. 소복하게 쌓인 눈 위를 걷는 첫걸음처럼 그도 지난 세월을 잊고 먼저 떠난 동료를 따라 새 시작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캔버스 속 눈 내린 호수의 작은 성당을 화가는 여름 한가운데서 만났다. 호수의 물기로 금세 두 눈이 젖어들고, 화가는 기꺼이 건축가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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