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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an 18. 2023

계단과 다리

숨겨진 두 개의 아치 *그림 권혜성

푸른빛 상의, 하얀 두건에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화가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이 그루지아 여인의 표정에서 화가는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가난한 엄마의 의지를 본다. 아기는 평온하게 젖을 빨면서도 간절하게 엄마의 시선을 쫓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여인은 품 속 아기를 화가에게 안긴다. 두 눈에 푸른 옷감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이를 볼 때면 화가는 눅눅한 계단 밑 어두운 골방에서 마지막 포도주와 함께 끝숨을 내쉬었을 가난한 성자 피로스마니를 떠올린다. 그가 이 아이를 탄생시켰고, 푸른 옷 여인의 품에 안겼고, 그리고 화가에게 아이의 미래를 맡겼다.


아이의 일로 작업실 문은 굳게 닫혔다. 아픈 아이를 들쳐 없고 수없이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온종일 에탄올 냄새에 젖은 손으로 현관문을 열면 몇 해 전 손에서 놓은 물감의 흔적이 코 끝을 스친다. 애써 화가의 일을 멀리하고 작업실 입구를 급히 비껴 가 아이를 침대에 뉘인다. 그것은 차라리 아이에 대한 원망에 가까웠다. 고통스러운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잠들면 화가의 밤도 깊어진다. 푸른 우울감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도무지 이겨낼 수 없는 날이면 숨겨둔 성자의 잔을 찾는다. 그렇게 작업실엔 빈 잔이 쌓여 가고, 알코올 냄새를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날도 늘어갔다. 여느 새벽처럼 아이의 울음소리에 겨우 붙인 두 눈을 힘겹게 깨운 화가는 작업실 한 귀퉁이에 세워둔 두 개의 아치를 보았다. 하나의 아치는 두 개의 계단을 잇는 통로였고, 다른 하나는 깊고 깊은 산사 입구 꽤 넓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다리였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흐르는 시내를 가로 건널 때면, 누구도 그 길이 아치 형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가의 그림에서, 화가는 처음 두 아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푸른빛과 하얀빛의 구름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다는 성소의 경계를 돌 무지개가 떠받치고 있었다. 옛 방주 이야기가 전해오는 하늘의 증서는 물기 머금은 대기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약속의 증서라지만, 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러니 불안한 실존을 위해 항구적인 징표가 필요하다. 때문에 땅의 증서는 보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물질의 언어로 새겨 둔 것이 아닐까. 건축가는 이 아치를 그려 화가에게 보증된 견고한 약속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닫아버린 작업실 문이 열리고 한결같이 열망했던 화가의 일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계시적 기호를 그려 보낸 것이다. 화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직도 손끝에는 옅은 물감 향이 감돈다. 그 손으로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젖은 눈망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순간 암울하기만 했던 한 가지 푸른색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배경은 푸른 담쟁이덩굴로 가득하다. 건축가에게 받은 승선교 아치 속은 푸른 숲으로 충만했고 그 신비한 기운을 아이의 눈 속에 그려 넣는 중이다. 아크릴 자국만 남긴 오래된 캔버스에 숨을 가다듬어 곱게 밑 칠을 끝낸 화가는 지금껏 그려온 작업 방식을 그만두기로 했다. 결핍을 감추려는 듯 덧대어 쌓아 올린 인물화 대신 단색조 색면에 간결한 선을 얹어 본다. 아이를 그리기로 한 순간부터 푸른 여인의 화가 피로스마니의 제한된 색면에 동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업실은 고사하고 떠돌이 화가로 살다 간 빈곤한 생의 힘에 끌린 것일까. 싸늘하게 식은 육체마저 성명불상자의 묘에 누인 그의 초상화들은 풍요로운 색감의 윤기와 비할 수 없는 강렬함을 지녔다. 최악의 생에서 최고의 그림을 창조한 피로스마니를, 무엇보다 투박한 푸른 옷 여인을 쫓아온 이유다.


화가는 아이의 손을 끌어당긴다. 모처럼 맑고 푸른 하늘 아래서 두 개의 아치 위를 걸어보려는 것이다. 꼭 백운교, 청운교를 오르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에 한 번 오르는 언덕 교회의 계단으로 족하다. 교회 가는 길 작은 지천을 가로지르는 삭막한 시멘트 다리에서도 약속의 무지개를 이야기할 수 있다. 어차피 길을 걷는 동안 아치의 존재는 가려있으니 문제없다. 이제는 커버린 아이의 손이, 물소리의 운율 따라 쏟아내는 재잘거림이, 여전히 호기심 어린 푸른 눈이 새삼 사랑스럽다. 그렇게 걷다가 서로의 눈이 맞닿을 때, 화가는 아이의 눈 안에 담긴 자신을 보았다. 진실은 아이 때문에 문을 잠근 것이 아니라 여기 이 아이가 닫힌 문을 열어준 것이다. 건축가에게 화가도 동일한 의미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이 그림과 아치 그림을 나란히 놓고서 잊고 있던 건축가의 말을 기억해 냈다. 자카르타의 겨울밤이었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건 날 닮은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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