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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Apr 15. 2023

곱사등이 건축가

그림의 레슨  *그림 권혜성

창밖은 눈벌판이었다. 스크린으로 마주하던 드너른 설경과는 사뭇 달랐다. 19세기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러시아제 기차의 검은 프레임은 화가의 기대만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길쭉하고 꼬릿한 치즈, 딱딱한 빵 그리고 보드카가 있어 그나마 지루한 밤여행은 이국적일 수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낯선 언어가 시덥잖은 농담으로 시간을 때우던 삼 남매의 주의를 끈다. 그들은 지금 아주 특별한 여행 중이다. 거대한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해체된 직후라는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네바강 습지를 메워 건설한 차르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하룻밤 사이 건물을 옮겨 도시를 재건했던 스탈린 시대의 모스크바, 여기에 건축가는 돈강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길을 따라 신도시 하나를 더하였다. 그는 특별할 것 없는 삼 남매의 아버지였고 언어도 피부 색도 다른 이방인이었다.


추운 나라, 더운 나라 가리지 않고 벽지라도 달려가 열정적으로 일했던 젊은 도시건설자는 이제 이젤 앞에 앉아 그 시절을 추억한다. 몇 차례 수술 후에도 좀처럼 붓을 놓지 않는 건축가의 뒷모습을 화가는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의 마른 상체에 가려 정확하진 않지만, 투명한 물통으로 번지는 노란 물감은 성이삭 성당의 돔을 지나간 붓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그때 그곳엔 푸른 눈, 갈색 머리의 신부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건축가는 언제일지 모를 딸의 결혼식을 상상하며 통역이 필요 없는 환한 미소로 그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지금, 성당 앞에 줄 지워 앉은 하객들의 표정까지 읽은 듯 세밀하게 채색화로 그날을 기억해 낸다. 혹한의 현장을 이토록 따뜻하고 화사하게 기억하는 것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준 가족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를 닮은 화가에게 숱한 스승들을 소개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제 막 그 길로 접어든 화가는 에메랄드 빛 미술관의 호화로운 장식과 규모에 두려움마저 들었다. 얼마 전 트레치야코프에서 만난 유형지행 열차칸의 가족을 잊지 못한 탓이다. 익숙했던 그림들과는 다른 대상, 대기, 이름들과 마주한 화가는 이콘화를 읽던 문맹의 신도들처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진 그 벽을 따라 숨죽여 걸었다. 낯선 이름들은 그녀가 배운 파리의 화단과는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구걸하는 소녀의 검은 눈동자와 미명의 광야에 홀로 앉은 그리스도의 두 손, 어둑한 방 안을 비추는 유일한 천창에 애써 기대어보는 남자의 뒷모습과 수송열차 철창 밖으로 뻗은 아가의 손에서, 대기가 아닌 사람들 속에 머문 빛을 보았다. 그리고 밤새 쫓아온 그 빛의 환영이 화가를 겨울궁전의 웅장한 홀 앞에 멈춰 세웠다. 서유럽을 모방해 낸 이 도시의 외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허상 위에 세워진 환영의 도시, 그 도시의 은신처는 세기의 이름들을 불러들였지만 정작 그곳에 피와 뼈를 묻은 그들은 잊혔다.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국에 들어온 어느 젊은이의 환청이 금빛 샹들리에 사이를 흐르며 다시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의 형제요.'


도판으로만 보았던 대작의 숲을 이름조차 남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혼령들과 함께 거닐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건축가의 성당 앞에서 화가는 그 얼굴들을 떠올린다. 크람스코이의 붓과 고골의 펜으로 그려낸 얼굴이 너무나 강렬해서 어느 부유한 컬렉터를 위한 마티스의 원색적인 춤과 선율조차 압도했던 그때, 그곳에서 화가는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지니고 돌아왔다. 자신의 붓으로 영혼 잃은 외투를 생산하지는 않으리라는 결심이었다. 황금빛 돔이 잊고 있던 그 약속을 일깨운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램브란트의 가련한 흐느낌이 건축가의 등 뒤로 쏟아지고, 뒤돌아보는 건축가의 얼굴에서 화가는 구원의 빛을 본다. 그리고 아주 잠깐 광야의 그리스도가 그의 얼굴 위로 스친다. 가족을 떠나 있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광야였을 것이다. 해 지는 광야는 더더욱 서글프고 추웠지만 한 번도 내색 않은 그였다. 전시를 앞둔 건축가의 이력엔 굵직굵직한 건설현장이 빼곡히 적혔지만, 도시 어디에도 그의 이름은 남아 있질 않다. 오직 그만이 폐허 위에 세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을 추억할 뿐이다. 화가는 건축가의 얼굴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열심히 일했다는 말로는 부족한 그 삶을 기록하기 위해 타국에서 만난 낯선 이름의 거장들을 다시 뒤적인다. 어디에나 있는 삶을 찾아 떠났던 그들의 시선은 따뜻했지만 그 붓끝은 날카롭고 혁명적이었다. 그렇게 진실한 삶에 닿기를 바랐던 거장의 얼굴들을 숨죽여 마주 보다 문득 건축가의 굽은 등이 떠오른다. 그의 삶은 어쩌면 곱사등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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