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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un 22. 2023

나팔의 천사

아드리엔의 글줄  *그림 피라네시의 로마의 건축

로마의 일곱 언덕, 팔라티누스, 그리고 포로 로마노 위로 천사의 나팔소리가 구름처럼 드리웠다. 세피아 잉크로 섬세하게 그려낸 화가의 스케치는 어딘가 모르게 고고학적이었다. 그림 목록을 살펴보던 친구는 그 앞에 한참을 멈춰 섰고, 바로 그 순간 <그라디바>를 떠올렸다. 오래전 프로이트를 통해 알게 된 그라디바의 이름에 얽힌 수수께끼가 발단이 되었다. 그해 그는 자기 이름의 운명을 쫓아 밀라노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여행의 시작과 끝엔 운명의 극단을 오갔다. 분명 정해진 길이었는데 로마에서 돌아왔을 땐 다시 정해지지 않은 길로 모든 것이 되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알려지지 않은 운명에 말을 걸기 시작했고, 언젠가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두었다. 애써 오래된 편지의 겉봉을 떠올려보니 주소도 우표도 없이 <미정된 운명의 아드리엔에게>라는 이상한 글줄 하나가 전부다. 예정된 우연이었을까, 아드리엔의 활자는 어딘가 모르게 크레타의 아리아드네를 닮아 있다.


처음엔 그저 건축가의 로마를 탐색하기 위해 나팔의 천사를 끌어들였다. 상상으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에 귀를 연 채 화가의 신경망은 온통 펜 끝으로만 향했다. 신화적 모티브만으로는 부족했다. 폐허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도시의 지층을 분석하기엔 과학자의 냉철함도 얼마간 필요했다. 허구와 사실을 넘나들며 고대 도시를 그려내던 화가의 선이 갑자기 멈춰 선 곳은 무너진 기둥의 잔해들 사이였다. 거기까지였다. 나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질 않고 화가는 기둥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의미가 되지 못하는 소리에 일부러 귀를 닫아 온 그였다. 오직 화가로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구했고, 소리가 없으면 그림도 없었다. 적막한 두려움이 화가를 에워싸고 펜 끝마저 멈춘 그때, 기둥에 새겨 있는 어떤 철자의 획인 듯 가느다란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았다. 아리아드네가 보내온 실의 끝자락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엔은 그의 작업실에서 오랜 편지의 기억을 한 올 한 올 풀고 있었다.


말펜사 공항에는 건축가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드리엔처럼 젊은 건축학도 또한 출구를 잃고 새로운 길로 접어든 직후였다. 계절은 무더운 여름이었고, 밀라노에서 베니스로, 베니스에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로마 그리고 베를린으로, 열차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그저 글줄의 재료들을 수집할 생각으로 떠났고, 어쩌면 마지막 자유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집요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 같다.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찍어 둔 독일인 아버지와 두 딸의 사진이 그런 시간들의 기억을 되살린다. 치밀함의 오점은 사진 어디에도 이름을 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옛 파일을 정리하다가 만난 그이들에게 임의로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페테> 그리고 두 딸의 이름은 각각 <아미나>, <레오카디>라 불렀다. 어쩌면 다른 얼굴을 한 저명한 문학가의 영혼이 볼로냐 미식가들을 사로잡을 붉고 푸른 들판을 지나는 그 차창 속으로 비밀스럽게 날아들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종착지였던 베를린 중앙역엔 아직도 닿지 못했고, 서로의 시작을 축하하며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피우미치노 공항으로부터의 비행은 계약취소라는 피켓으로 아드리엔을 맞았다.


건축가와 화가의 그림은 아주 긴 우회로를 느린 호흡으로 따라 걷는 그에게 아리아드네가 되어 주었다. 운명과의 숨바꼭질에 <그라디바>가 찾아왔듯, 지극히 사적인 그림 대화의 행간을 읽어가는 동안 다시금 잊고 있던 이름들을 되뇌고 있었다. 그리스어와 독일어가 겹친 <그라디바>처럼 상기된 이름 또한 다른 언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속한 것이었다. 때로는 대단히 낯선 단어들이 서로를 불러내고 어울리는 순간도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단어와 단어는 그 생김새와 쓰임이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하나의 완성된 글줄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자칫 완결되지 못한 이탈리아 여행기의 파편적 인상이 이 단어들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망각의 어스름이 내리던 그때, 화가의 나팔이 온갖 신전과 건축물의 고허 위에 잠든 비문을 흔들어 깨우고 글자의 영혼은 미처 잇지 못한 단어들의 글줄을 짓는다.


페테 Peter는 그의 이름에 걸맞게 돌을 다듬는다. 그가 정성스럽게 다듬던 돌은 고대 도시의 지층을 이루었다. 그의 아미나 Aminah는 '예언자의 어머니'답게 페테의 돌 위에 철필로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훗날 폐허의 도시가 될지라도 그녀의 글자들은 영원히 살아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다. 잘려나간 획의 끝을 애써 읽어보려던 건축가는 끝내 그 원형을 복원하지 못하고 사라진 소리의 잔해 그대로 옮겨 두었다. 건축가가 멈춘 그곳에서 화가의 선이 다시 움직인다. 나팔 소리와 함께 잃어버린 글자의 획들이 되돌아오고, 한 자 한 자 소리를 입혀 완성한 이름은 도시의 어둠을 밝히던 옛 베스탈 가운데 하나인 것만 같다. 그때도 레오카디 Leocadie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시의 길목을 밝혔다. 불빛에 드러나는 페테의 정교한 솜씨는 수없이 파괴되고 다시 쌓아 올린 거대한 역사적 무덤이 되어서도 여전히 찬란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 이름은 보이질 않고, 포로 로마노에는 위대한 신과 왕과 귀족들만이 남았다. 크고 작은 건축물의 잔해와 포장석 사이로 끈질기게 피어오른 이름 없는 잡초와 화초들만이 세 이름을 알고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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