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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May 27. 2023

오해와 이해

낱말들의 뒷면  *그림 차정인의 여자공부

화가는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선다. 얼마 전 우편으로 도착한 책 한 권이 책상 위 반듯하게 놓였다. 두툼한 책 표지엔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여인의 실루엣이 선명하고, 낯익은 친구의 필체로 꾹꾹 눌러쓴 겉포장은 비 오는 도로를 달려오느라 눅눅했다. 그리기를 멈춘 화가를 말없이 지켜보던 그가 보내온 선물은, 윌킨스 프리먼의 단편집이었다.


어쩌다 페미니스트가 된 것은 아니다. 긴 시간 건축가의 부재로 화가의 엄마는 피곤했고 지쳐 있었다. 혼자 감내해야 했던 살림과 육아는 원망과 분노가 섞인 짧은 낱말들을 대기에 흩뿌렸고 그 단어들을 주워 담아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 화가는 책장에 꽂힌 울프의 단어들과 맞추어보며 비밀스럽게 엄마를, 여성을 위로했다. 스스로를 과격하게 내던진 데이비슨보다는 불평등을 기록할 언어들을 다루었던 울스턴크래프트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글쓰기의 힘에 기댄 메리처럼 화가도 자기만의 방에서 그렇게 고요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수세월이 흘러, 잊고 있던 그 방문을 <루이자 엘리스>가 두드린다. 정리된 물건들과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온 그녀는 떠난 약혼자를 원망하기보다 도리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아내가 되고, 일을 하면서, 화가는 엄마의 언어들을 이따금 꺼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 말의 뒷면에서 또 다른 언어가 물에 젖은 잉크처럼 스며 나온다. 그것은 비밀스럽게 새겨 넣은 건축가의 말이었다. 그는 그대로 서글펐다. 그가 선택한 외로움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을 포장할 수 있는 모래 바람과 눈이 시리도록 쌓여가는 눈발에 그리움을 숨겨야 했다. 드러내지 않은 그 시간들을 가족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쌓인 오해와 멀어진 거리만큼 건축가의 그림 창고에는 여러 크기의 캔버스들이 늘어갔다. 홀로 머물렀던 도시, 가족들과 거닐었던 도시, 가보고 싶었던 도시의 풍경들을 그리면서 독백처럼 새겨 넣은 건축가의 기억을 화가는 암호를 풀듯 주의 깊게 읽는다. 오랜 시간 엄마의 언어에 길들여진 그녀는 그림 너머 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제 막 날짜와 이름을 새겨 넣은 <타워 브리지>는 하얀 보름달과 진청색 밤하늘 그리고 템스강변을 따라 일렁이는 빌딩들의 조명에 더욱 아름답다. 건축가의 붓끝으로 걷는 강변을 화가도 따라 걷는다. 유년시절 건축가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저 꿈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울프의 시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어느 초라한 거리악사의 뒤를 따르며 그녀는 생각했다.

'자기 아들이 화가나 시인이나 음악가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는 부모는 거의 없어. 세속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예술에서 표출되는 사고와 감정의 표현이 남자답지 못하므로 훌륭한 시민이라면 이를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어쩌면 화가는 아들이 아니어서 화가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못다 한 꿈을 정작 아들에게는 권하지 못한 건축가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두 세기가 지나도록 넘어서지 못한 그 남자다움에 대한 신념의 대가는 완벽하게 "교양 있는" 아들들이었고, 오로지 아들이 아닌 화가만이 물감 냄새가 쌓여있는 오랜 창고 문을 두드렸다. 언제부터인가 화가는 어둡고 고요한 창고 안을 관찰하며 그곳에 기록된 색채와 형상과 냄새의 해석자가 되었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의 감각세포는 새로운 그림의 언어들로 충만했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템스강변의 검고 푸른 밤공기가 살짝 화가의 손끝을 스치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녀는 자기만의 방으로 달려간다. 창을 열듯 얼마간 닫혔던 책장을 연다. 프리먼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교양에 반하는 용감하고 명랑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빠져 자칫 지나칠 수 있었던 이름들을 다시 찾기 위해서다. <단 한 번의 호시절>을 위해 전 재산을 다 쓰고도 얼마를 빚지고 돌아온 약혼자를 애처롭고 다정하게 바라보던 윌리엄 크레인이 먼저 활자들 사이로 걸어 나오자, 화가 또한 그를 다정하게 맞는다. 부드러운 그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낯익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고, 숱도 많지 않은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한 데다, 몸도 마음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인내하며 살아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표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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