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정의 서 Oct 17. 2023

트미실 로시난테

끝의 시작  *그림 권혜성

가까이 올림픽 공원을 두고서도 건축가는 흐드러진 야생풀과 꽃을 벗 삼아 나지막한 동산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걷다 보면 그 끝엔 언제나 작은 정자와 물 흐르는 소리가 기다리고 있다. 처음부터 그는 탁 트인 거대 정원 대신 소박하고 경사진 오금공원을 딱딱하고 건조한 아파트 생활에 숨통 하나 틔워줄 장소로 택했다. 한참을 이국적 도시 풍경에 빠져 있던 붓질을 멈추고 익숙한 인공폭포의 풍경과 함께 작고 평범한 동네 공원을 그리기로 한 것은 화가의 책장에 꽂힌 그림책 한 권 때문이었다. 미야자와 겐지의 <11월 3일>이 물기 머금은 초록빛 시집으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의 글자들을 그저 옮긴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린 기도 같았다. 책에는 빠졌지만 시의 끝에 후렴구처럼 덧붙은 불경 구절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작은 책의 낱장을 가만히 눈에 담으며 건축가는 공원의 풍경에 박힌 기념비를 읽듯 그림 속 활자들을 한 자 한 자 읊조린다. 걸음처럼 그의 생도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 어느덧 낙하의 지점에 다다랐다.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한 발걸음을 북돋우려는 바람에 "지지 않는 튼튼한 몸"에 강조점을 찍어 읽는다. 


한가로운 미술관 입구로 화가는 관람자용 휠체어를 밀고 온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을 마음껏 감상하기 위해 건축가는 이제 보조기구에 의지해야만 한다. 건강한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기보다 건축가의 걸음에 맞는 규모의 전시장을 더 찾아야겠다고 화가는 생각했다. 어쩌면 바벨의 도시들을 쫓아다니며 명성을 쌓던 그 시절의 열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건축가의 소원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걸음이어도 그의 끝의 시작을 돕고 싶었다. 시인의 기도가 그림이 되고 책이 되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화가는 건축가의 사사로운 기억들을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함께 한 기억의 순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이 더 많다. 화가에게는 공백인 순간들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나서야 했고, 그 시작은 <트미실>이었다. 


위험! 이곳은 수심이 깊고 경사가 급하여 위험하오니
낚시, 수영 등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소류지명:트미실


건축가의 손그림 지도를 따라 어렵게 찾은 트미실은 그림의 해바라기처럼 따뜻하고 정겹지는 않았다. 갈대와 낙엽으로 뒤덮인 늪의 가장자리를 엉성하고 간단한 나무 울타리가 길게 두르고 있는데, 강제할 수 없는 붉은 경고 표지판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수십 년 전 모습 그대로라면 어린 건축가의 실족은 동네의 잦은 사고였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경고는 허약한 문자 대신 늪지대 주위를 지키고 있는 기이한 형상의 인형들이 내뱉는다. 버려질 농기구 자투리로 만든 "로시난테", 아니면 긴 주름 호수를 덧댄 코끼리인지도 모를 검은 피부의 수호자가 늪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건축가가 떠나고 어느 "돈키호테"가 마을의 물을 지켜오고 있었다.  


트미실의 물길을 건축가의 산책길 끝에서 다시 떠올려보던 화가는 폭포를 거슬러 안내판과 기념비 여럿을 지나 공원 높은 곳으로 올랐다.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니라 물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그들의 도시 이야기를 마무리할 참이다. 세련되고 안전한 나무데크를 따라 오르면 그 끝엔 오래된 배수지가 있고 물을 저장해 두었던 탱크와 배수관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풍경의 깊이를 더한다. 거기도, 여기도, 버려진 것들이 장소의 기억을 지키고 있다. 그저 무의미한 "사물들의 더미"로 방치하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조형물을, 또 누군가는 공원을 만든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익명의 사람들이 건축가와 화가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잇게 했다. 철학자의 말처럼, 이야기가 없으면 모든 것도 사라진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건축가의 손끝이 가볍다. 이 짧고 느린 읽기는 건설하기 위해 파괴해야 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속죄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시인처럼 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전 10화 나팔의 천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