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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Nov 24. 2022

자카르타 1998

<두 도시이야기>로 가는 길  *그림 권혜성

아버지는 건축가, 딸은 화가다. 아버지의 인도네시아 장기 출장 중 미대생 딸이 동행했다. 자카르타. 잦은 해외 체류로 소원해 가던 부녀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된 도시다.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건축가로 일했고, 딸은 그림을 그렸다. 창조자의 정신과 일을 지녔다는 점에서 부녀는 닮았다. 다만 그런 공통점을 서로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25년 전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무언의 대화도 그렇게 망각의 지층에 묻히는가 싶었다.


세계를 무대로 바쁘게 건축 현장을 누볐던 아버지는 찬란했던 기억들을 틈틈이 스케치로 옮겨두었다. 건축가다운 정교함과 계산이 그림에서도 읽힌다. 자와 컴퍼스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검은 베레가 잘 어울리는 백발의 건축가는, 이제 막 "회화의 기술(The Art of Painting)"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용문사 어디쯤에서 멀리 보이는 범종루 단청을 그대로 재현해 보겠다는 호기로움이, 때로는 "향수" 한 소절 흥얼거리며 떠오르는 소박한 고향 이미지가 그를 캔버스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동안 건축가의 딸은 붓대신 분필을 손에 쥐었다.


자카르타에서, 그리고 졸업 후 치열하게 고민했던 형태와 색의 기록들은 언제부터인가 화가의 작업실 한쪽에 방치된 채 잊혀갔다. 아버지의 시대엔 화가와 같은 방황은 사치였다. 그 시대엔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가족을 위한 최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건축가는 자신을 표현할 때 그 시절 ‘일’ 이야기를 한다. 예민했던 청소년기, 그런 아버지의 부재가 화가에게는 가족이라는 단어의 왜곡된 형상으로 자리매김했는지도 모른다. 자카르타의 기록은 결핍된 자아를 탐색하던 화가의 내적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화가로서의 시간에 몰입해 있었다. 귀국 후 그때의 기억이 지속되지 못하고 늘어지고 변형되고 희미해지면서 화가의 붓도 탄력을 잃어갔다.


언제나 확신에 넘치는 아버지의 시선과 끝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딸의 시선이 같은 도시, 다른 기억으로 다시 발화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극단의 이야기가 엮여 역사가 이어지듯 지극히 사적인 부녀의 기억도 상이한 세대의 신념과 시선을 담고 있기에 역사적일 수 있다. 화담 형식을 빌어 그려보는 부녀의 이야기엔 마네트 박사의 파리와 루시의 런던처럼 혁명이라는 극적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동일한 공간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건축가와 화가의 형식적이고 시대적인 시선차가 대비되어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들의 회화적 서사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공존하며 이야기 주체의 성격적, 경험적 극단들을 융해한다. 그렇게 이야기의 한 축은 단절된 시간의 기억일 테고 다른 축은 오마주적 풍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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