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침
파리는 내게 선물이었다. 논문 심사가 한 학기 연기되고 또 시댁과의 갈등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피해 가라고 주어진 선물. 논문이야 이전 쓰기를 뒤집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지만, 결혼으로 맺은 관계는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례함, 그것이 십수 년 다른 성씨의 사람들과 가족으로 엮어 살면서 내린 나의 정의다. 결혼 전도, 결혼 후에도 친정 엄마는 사위와 딸에게 말을 낮춘 적이 없다. 그런 말의 정서에 길들여진 나는 시댁 모임에서 오가는 대화와 어휘를 참아내기가 힘들었고, 급기야 윗동서의 막다른 언행은 남편과의 관계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분노와 눈물로 지새우던 밤을 함께 해 준 이는 남편이 아닌 파리의 언니였다. 그래서 시아버지 기일에 맞춰 난 그들을 피해 파리로 향했다. 논문자료조사라는 합법적인 핑계를 둘러대고.
파리 17구 소쉬르가에 위치한 언니의 아파트는 백 년이 넘은 낡은 5층 건물이었다. 나무 계단을 오르내릴 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반질거리는 난간은 역사적이었고, 아침마다 빵 굽는 냄새를 선물하는 작은 덧창을 댄 발코니는 이국적이었다. 몇 해 전 우리의 파국을 막아준 이 역사적이고도 이국적인 감각을 남편이 일깨워준다. 삼일 줄곧 전통적인 밥과 찬으로 식탁을 차리던 남편이 아내가 좋아하는 유럽 요리에 도전한 것이다. 미식여행의 넷째 날은 조금은 간소한 파리식으로 시작했다. 파리 K와 함께 했던 아침의 그 신선한 빵냄새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그 시간을 추억할 만큼 의미 있고 멋진 식탁이었다. 좋아하는 본마망 마롱잼과 갓 구운 빵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커피 한 모금 마시던, 나만 아는, 그 아침이 이야기로 펼쳐진다. 한국에선 쓰지도 않던 동전을 한 손에 꼭 쥐고 삐걱대는 아파트 계단을 무언가에 홀린 듯 걸어내려 가 1층 빵집서 기다려 사온 그 값싼 빵이 적어도 내겐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같았다. 남편에게 그 소리와 향과 장면을 전하려 애를 쓰지만, 정작 그에게 그 시간은 되돌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우리의 울타리를 허물던 그녀 역시 K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최악의 K를 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속 미움과 분노를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어-친정에서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글로 말을 대신했다. 일종의 치유의 글쓰기였다. 시댁 다녀오는 날이면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면서 그들의 이름은 남편과 나 사이에 금기어가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는 기일이며 명절이면 침묵의 시간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점차 그와 나에게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겨울 아침, 친정 엄마가 차려준 생일상으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K였다. 따로 만나 이야기 좀 하자는 말에 불안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웃으며 K 집 근처로 갔다.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내 마음속에 쓰레기를 다 받아내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이 K에 관한 첫 글쓰기였던 것 같다.
지난 오월, 회사 업무로 인도네시아서 지내던 파리의 K가 한국에 왔다. 코로나 확산으로 인도네시아 외국계 기업 근무자들이 자국이나 비교적 안전한 코로나 관리 국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형부와 언니는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6년 전 베푼 따뜻한 위로와 환대를 이 식탁으로 갚고 싶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만나질 못한다. 대신 최고의 K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그림에 관한 탁월한 안목을 지닌 그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면 몽소 공원의 밤 달이 그림처럼 번지는 때까지 미술관을 함께 걸었다. K가 물으면 내가 아는 모든 미술사 지식을 다 끌어다 이야기하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최악과 최고의 K가 동년배다. 모든 것들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 관계도 그런가 보다. 어찌 되었건 올해는 코로나 덕분에 최악을 피하고 최고를 기억하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