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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ul 19. 2023

어긋난 암호

일곱 교회 순례기 4 빌라델비아 

형과 동생은 서로를 의지했다. 동생의 별명은 필라델포스(형제를 사랑하는 자)였고, 형은 동생과의 우애를 기리며 필라델피아(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도시)를 세웠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페르가몬 왕조의 이야기다. 우리가 기억하는 찬란한 헬레니즘 문명은 사실 이전투구의 이미지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신들의 폭력 그리고 비극적 운명에서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인간, 되풀이되는 형제 살해,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자비 없는 징벌. 이토록 난폭하고 무자비한 고대 사회에서 살아남은 형제애는,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아름다운 이름의 도시에는 동일한 이름의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오직 사도 요한의 마지막 글에만 등장할 뿐, 누가 언제 그 도시에 그리스도를 전하였는지는 기록된 바가 없다.  


필라델피아 교회에는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열 수 있고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자 없다. 지금은 덩그러니 기둥만 남아 더 이상 문이 필요치 않은 유적 위를 걸으며 요한이 전한 문의 형상을 떠올려본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열리는 그 문은 두 기둥 사이에 매달려있다. 하나의 기둥엔 건물주의 이름이, 그리고 다른 기둥에는 건물의 주소가 새겨져 있다. 그 문을 여는 암호는 "새 이름"이다. 암호는 누구에게나 알려졌지만 누구나 그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호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너희가 나 있는 곳 어디든지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순례자가 문 앞에 섰다. 짐짓 겸양한 듯하나 그 음성엔 은근히 자랑이 배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주님의 봉사 현장에 있었다오."


행여 질세라 다른 순례자가 말을 더한다.  

"난 주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지. 그분의 후원으로 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오."


그러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서로에게 지어 보이며 한쪽씩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견고하게 쌓아 올린 기둥에 매달린 문은 그 무게 때문인지 미동도 않는다. 두 순례자는 서로의 위치를 바꿔본다. "하나, 둘, 셋" 함께 힘주어 당겨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암호가 잘못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수없이 "주님"을 부르고 외쳤다. 유적 담벼락 앞, 기념품을 파는 한 상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지금껏 이곳을 다녀간 여행자 중 문을 연 자를 보질 못했소. 하나같이 같은 암호를 대는 것 같던데... 아무래도 그대들이 찾는 문은 여기가 아닌 것 같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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