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순례기 5 버가모
강렬한 여름 해를 가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금은 빈 제단 터를 지키고 있다. 그늘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나무는 해를 가리고 바람길을 열어 주는 고마운 쉼터다. 로마의 영화를 꿈꾸었던 옛 페르가몬 왕조의 아크로폴리스를 힘겹게 오르며 사라질 신들의 집과 왕궁을 위해 묻혀 간 무수한 석공들의 이름을 발끝으로 두드려본다. 누구도 그들의 이름을 새겨두지 않았다. 폐허가 된 길 위에 남아 있는 돌조각 어느 곳에서도 이름자 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혹시 내가 알만한 신의 이름, 왕의 이름이라도 새겨진 것이 있을까 뒤져보지만 남아 있던 모든 것은 베를린의 모방된 페르가몬으로 옮겨졌다. 어떤 제국은 생명을, 또 다른 제국은 이름을 앗았다.
나무 밑 바람길에 빨갛게 익은 얼굴을 내밀어본다. 곁에 있던 아이의 얼굴엔 조그만 선풍기 바람이 붉은 열을 식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돌무더기에 앉아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요한의 계시에 유일하게 기록된 이름 하나를 떠올린다. 안디바, 그에게는 "나의 증인"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상을 거슬러 모든 사람들이 추앙하는 신들의 이름을 거절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던 그에게 그리스도가 친히 새긴 이름이다. 안디바의 이름엔 그토록 다정하던 칼 끝이 다른 이름들에게는 매섭도록 날이 섰다. 차라리 무너진 잔해가 무명의 돌인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갈기갈기 찢기워졌을 것이다.
페르가몬 제단의 긴 벽을 따라 올림푸스 신들의 심판 아래 있는 거만하고 무례한 거인족이 조각되어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묘사된 거인족 또한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그래서 거대한 산더미에 몸이 짓눌려 죽는 형벌을 받는다. 아테나의 손에 머리채가 잡힌 알키오네스를 도우려 가이아가 솟아오르듯, 거인들의 몸에서 나온 피로 물든 대지는 그 피에 생명을 불어넣고 다시 무자비한 종족이 태어난다. 시인은 학살과 피로 점철된 세상을 냉소하며 평한다. "피에서 태어난 피의 자식은 어쩔 수 없다." 제단의 동쪽에는 승리의 관을 든 니케가 날아오르지만, 제우스의 번개로도 아테나의 창과 포세이돈의 삼지창으로도 세상의 악행은 소멸되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를 기념하는 신들의 눈앞에서 더 참혹한 살해가 벌어졌다.
오후 4시의 태양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곳이다. 땅이며 바위며 그늘을 지니지 않은 것들은 온통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이곳에 대제단이 있었고, 해가 쏟아지는 광대한 앞마당 입구에는 청동 황소 두 마리가 제단을 마주하고 서있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오른 황소의 머리부터 기름을 부어 내리면 빛을 발하는 정교한 청동 표면을 타고 미끈한 기름이 흘러내린다. 기름을 입혀 윤이 더한 청동 황소에 사제 발람이 다가선다. 교활하고 오만한 미소를 머금고 황소의 네 발에 불을 붙인다. 황소의 등에는 제물이 놓였다. 안디바의 육신이다. 그에게 마지막 업무가 주어졌다. 무수한 신들과 왕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었다. 그가 이름을 새기는 순간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내리는 모든 자들의 입이 그 이름을 찬미할 것이다. 안디바는 조용하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무 그늘에 앉아 바람결에 스쳐가는 환영을 본다.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어른거리는 안디바는 평온하다. 불길 너머 프리즈의 신들과 거인족은 아직도 전쟁 중이다. 그때 미세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를 맴돈다.
'내가 높은 곳에 올라가 신들에게 제물을 불살라 바치던 일을 멈추게 할 것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부드러운 피리소리처럼 내 마음이 모든 것을 잃은, 남은 것 하나 없는 이들을 위해 슬피 운다. 그러나 훗날, 내가 만사를 바로잡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