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순례기 6 서머나
이즈미르는 내 고향 부산을 많이 닮았다. 해안가를 끼고도는 도로와 초고층빌딩, 그리고 바람은 여느 대도시 못지않은 풍광을 자랑한다. 혹은 어느 선착장에선가 저 호메로스의 웅장한 서사시를 멋들어지게 읊조리는 노교수의 포세이돈을 볼 것도 같다. 바람의 세기를 따라 낭송의 운율도 부드럽게 잇거나 짧게 끊어 강조하기를 적절히 분배할 것이다. 한 번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를 실어 변덕스러운 전쟁시를 읊는다. 또 한 번은 황금을 머금은 지중해의 대기 속으로 귀환을 멈추는 세이렌의 청아한 노래를 싣는다. 시인의 고향이라지만 정작 그 흔적은 남아 있질 않고, 에게해의 바람과 파도만이 이만 칠천 시구의 잔상을 흩뿌릴 뿐이다. 차라리 흩어진 단어들로 족할지 모른다. 검증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는 자의 손으로 시의 장소를 모방해 두었다면, 그것이 더 끔찍했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모두 풍경의 자식들"이라던 어느 시인의 조언을 따라 바람과 구름과 바다에 새겨둔 활자들의 풍경에 빠져보면 그만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반드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 역시 교회들에 편지했다. “귀 기울여 들어라. 바람 불어오는 그 말씀에…“ 푸른 물결 위로 아름다운 주름을 잡는 제피로스의 유혹에 맞서 이즈미르의 성도들은 사도의 조언을 따랐다. 얼마간의 시험을 앞두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다. ‘환란은 곧 지나갈 것이다. 죽었으나 살아있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풍요로울 것이다.' 담벼락 너머 살구색 속살을 드러낸 옛 교회는 그 시절 성도들을 대표하는 이름표를 지녔다.
Saint Polycarpe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으로도 사르지 못한 그의 육체는 불가해한 광경에 두려웠을 형집행자의 칼에 스러졌다고 보고되었다. 사도의 예견대로 그리고 자신의 믿음대로 순교자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자가 되었다. 특별한 죽음이 아니어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누구에게나 부여되는 별칭 "성자"는 어디에서나 광배를 두르고 나타난다. 이즈미르 교회 천장을 뒤덮은 황금빛 혹은 새하얀 광배를 나는 어느 연로한 선교사 아내의 눈부신 미소에서 보았다.
일흔을 넘긴 그녀는 마르마라 해 남쪽 부르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독특한 모스크와 거대한 제국의 사회 경제 시스템을 초안한 퀼리예 Külliye가 시작된 도시를 마지막 정착지로 삼은 것이다. 더위에 약한 아내는 수십 년 인도의 기후를 견뎌내야 했다. 옛 올림푸스 산이 명성 높았던 도시를 두르고 있어 겨울이면 새하얗게 눈을 입은 원경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은퇴 선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열병을 앓듯 외롭고 고된 선교 여정 끝에 고국이 아닌 튀르키예 이주를 결정한 남편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다. 대로와 골목마다 오랜 제국의 고풍스러운 문양과 색조로 누구라도 사로잡을 매력을 지녔다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술탄의 도시를 살아낸다는 것은 이즈미르의 성자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편하고 힘들었을 아내의 숨은 감정들을 대신 들추어가며 섣부른 위로의 말로 덧입히려던 나는 곧 단어들을 주워 담았다. 부드럽고 상냥한 노부인의 시선과 말없이 웃음 지어 보이던 얼굴에는 위장된 자유를 앞세우며 회유하는 자들에 답하던 폴리캅의 말들이 바람 불듯 스쳐간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