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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Dec 02. 2023

미소의 아고라

일곱 교회 순례기 7 에베소

아고라는 상이한 언어들의 시장이었다.


화려한 기둥머리와 프리즈로 조각조각 맞춰 올린 옛 도서관의 파사드를 지나 펼쳐진 거대한 광장엔, 내가 아는 말과 모르는 말들이 뒤섞여 7월의 태양을 머금은 대리석 길과 기둥들에 소란스럽게 들러붙는다. 겨울날 도서관 내부를 가득 채우는 온풍기 바람과 그 더운 공기층 사이로 짙게 퍼지는 활자들의 냄새에 익숙한 이방인의 걸음을 낯선 풍경과 소리가 멈춰 세운다. 그러자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안내자의 익숙한 언어를 가만히 빼내고 시장의 언어, 살아있는 말들의 공명 속에 빠져 들기로 했다. 뜻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웅성거림, 리듬, 고저만으로 모든 말들이 소통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말의 교환은 제 자리가 아닌 곳에, 하지만 그 형태가 딱 들어맞는 기둥의 조각들과 닮아 있다. 복원한 건물의 파편엔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어 전문가의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문맹의 여행자들에게는 몽타주적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기둥머리를 올려다보며 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 길 사진 속에서 상이한 시간들을 겹쳐 보았던 롤랑 바르트를 떠올린다. 그리고 낯선 말들의 진동이 이천 년의 시간을 밀착시키는 신기루를 머나먼 셀축의 여름 대기 속에서 보고 있다.


정오의 해가 사도의 무덤 사방으로 짧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몇몇 관광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옛 바실리카의 잔해들 속에 고요하고 쓸쓸하게 누운 정사각형 비문을 태양에 맞서 렌즈에 담아본다. 사도의 손글씨로 그려 넣은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는 은빛으로 번져나가는 태양의 아우라와 흩어진 건물의 파편들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네 기둥의 이미지로 바뀌어 있다. 편지의 시작처럼 사도의 시대는 어둠을 밝히는 빛들이 필요했다. 그 빛은 박해받는 성도들의 믿음을 비추었고 의심 많고 미혹되기 쉬운 이들의 길을 밝혀 주었다. 추방지에서 돌아와 에페수스의 언덕에서 써 내려간 사도의 글자들 또한 사랑의 빛이었다. 그 애정 어린 시선을 빌어 화려하고 웅장했던 옛 이오니아의 수도를 그저 걸어보는 것만으로 환상과 계시로 가득 찬 낱말들에 현실성이 들러붙는다. 사도는 어느 교회보다 먼저 에페수스의 성도들에게 처음 사랑을 기억하라 부탁했다. 아르테미스의 풍요가 도시의 거리를 요란스럽게 치장하고 새로이 등장하는 사상과 이론으로 아고라는 매일같이 번잡했을 것이다. 그런 지적, 시각적 혼잡함 속에서 믿음의 정통성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철저하게 시험하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꼭 필요한 것을 일러준 것이다. 그 시절 아고라를 현재적으로 옮겨 놓은 듯 고대 도시의 풍경 혹은 사도들의 행적을 복원해 보려는 여러 언어들의 충돌이 짜증스럽지만은 않다. 소란스러운 도서관 앞에서 가만히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보는 내게 어느 금발의 여인이 보내준 미소가 사랑스럽다. 


어둠은 사라지고 등불과 빛이 쓸데없는 그때는 모든 이들의 시선과 표정이 저 여인과 같으리라. 아니 얼굴들이 비추는 그 환한 웃음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 도시에는 빛을 비추어 줄 해나 달이 필요 없습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며, 어린양이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_유진 피터슨

여인이 웃어 보인 그다음 문장은 이러했다. '그 빛을 서로 나누며 환하게 미소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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