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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Jun 20. 2022

#63. 당근으로 바퀴벌레를 잡았다

지난 목요일의 일이다. 퇴근  푸름이와 여의도 카페 콤마에서 짧지만 굵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지 집안일을 후다닥 하고 쉬어야지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바퀴벌레를 봤다. 화장실 근처  쪽에 자리 잡은  벌레였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하나는 벌레를 무서워하는 . 나보다 훠얼씬 덩치가 작은 벌레라는  알지만 공포감은 어쩔 수가 없다. 화장실에  수가 없어 손도  씻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삼십여 분간 가만히 있었다. 털이 쭈뼛 서고 머리가 띵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수가 없었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동생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귀찮아했다. 남편에게 연락을 했지만 남편은 지금 해외에 있어 물리적으로 해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친한 친구들과 카톡방에서 하소연을 하자 가까이 사는  친구가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도 나도 알고 있다.  친구도 나처럼 벌레를 잡을  없다는 것을. 그래서 거절을 하고 하소연만 이어 갔다. 벌레를 잡거나 쫓아내야 하나 고민했다. 잡는 건 도무지 자신이 없고  눈에서만이라도 안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소심하게 벌레 쪽으로 휴지를 던져 보았는데, 이것도 나로서는 엄청난 용기로  건데 벌레는 움찔하기만   자기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상심한 나는 친구들에게 군포에 있는 동생 집으로 가거나 시댁에 가거나 호텔방을 잡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른  친구가 당근에 올려보라고 했다. 당근이라. 간혹 벌레 잡기 게시물이 올라온다는  알고 있지만 당근에서 쓰는 바이럴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에 올리면 누가 보기나 할까. 혹여나 나쁜 사람이 오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글을 올렸다.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왔다. 집의 대략적인 위치와 벌레의 크기, 벌레가 있는 곳을 설명했더니 혹시 모르니 전기 파리채를 챙겨서 호다닥 와다닥 오겠노라 답이 왔다. 와주겠다는 말이 구원의 메시지처럼 느껴졌고,  편으로는 내가 당근으로 이런  하고 누군가 답을 주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아파트 현관에서 벨을 눌러 인터폰으로 그분의 모습을 봤는데 전기 파리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비장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꽤나 쾌활한 분이셨는데, 웃으면서 이것저것 확인하시고는 장갑을 끼고 벌레를 잡았다. 변기로 흘러 보내면 안 될  같다며  채로 가져가서 처리하겠다는 모습에 그녀를 추앙하고 싶어졌다. 사례비를 드리고 그녀가 돌아갔다.


긴장이 풀리니 이 모든 상황에 웃음이 나고 재밌게 느껴졌다. 벌레를 해결했다고 친구들과 남편에게 말하고 나니 벌레를 잡아준 그분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다음번에 혹시 또 벌레가 나오면 그땐 그냥 잡아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분 외에도 메시지가 여러  왔었다. 그중 남자분도 있었는데, 혹여나 여자분으로 구하지 못하면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분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혹여나 기다리실까 봐 메시지를 보낸다고 덕분에  해결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답이 왔다.


이 일을 겪으며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늦은 시각에 요청하는 도움에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통해 해결을 하고 위로를 받았다. 나는 벌레 하나도 못 잡는 쫄보인데, 벌레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엔 그냥 잡아주겠다는 메시지에 내가 당근에서 벌레 잡는 거래를 한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서 든든함과 따뜻함을 얻었구나 싶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내게  와주겠다던 친구와 묘책을 찾아준 친구, 그리고 내가 안쓰럽다며 한국에 돌아오면 벌레를 다 잡아주겠다는 남편, 벌레를 잡아준 따스하고 쾌활한 그분까지 내 주위에 마음이 넉넉하고 좋은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벌레 이야기를 주말에 시부모님을 만나서도 했는데, 다음부터는 늦은 시각이어도 상관없으니 당신들에게 연락하고 말씀해주셨다. 참 다행이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그리고 나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비록 나는 벌레를 잡으며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돕고 위로하며 사랑하며 살아야지. 그래서 내가 그날 느낀 위로와 안정, 든든함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해야지 하고 생각했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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