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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Jul 12. 2022

#64. 낯선 사람이 내게 완벽주의자냐고 물었다.

정선 님은 완벽주의자 같은 경향이 있으신가요?

  
첫 피아노 수업 때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다. 십여 년 만에 피아노를 치자니 수업 내용도 잘 이해가 안 되었고, 손가락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이런 질문을 했다. 완벽주의자라.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이 워딩이 맴돌았다. 심지어 그다음 날 아침까지도. 여태껏 나는 나 자신을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내가 너무 게으르다든지 지속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아니 사실은 이런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지.  


완.벽.주.의.자.


계속 곱씹다 보니 초등학생 때 일이 생각났다. 2학년 때 여름 방학을 앞두고 방학 생활 계획표를 짜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친구 집에서 과제를 좀 하다가 놀다가 하니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조금 쉬었다가 숙제를 마무리해야지 했는데 그만 딥 슬립을 했었지. 그다음 날 아침, 하다만 숙제를 가지고 학교에 가는 게 왠지 모르게 끔찍한 일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학교를 안 갔다. 그것도 한 일주일 정도. 가끔씩 떠오르는 에피소드였고, 그때마다 선생님한테 혼나는 게 무서워서 학교를 안 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아닌 것 같다. 학교를 안 가서 오히려 엄마한테 죽도록 혼났으니까 집보다는 학교를 가는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럼 왜 학교를 안 갔을까. 완성되지 않은 과제를 제출하기 싫었던 것 같다. 과제를 안 하면 안 하는 거고, 하면 완성을 해야 하는 건데 이건 뭐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상태인 게 너무나도 싫고 끔찍했던 것.


이 에피소드가 완벽주의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성향은 여전하다. 일이나 가정생활에서도 드러나지만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끝맺지 못한 글은 이어 쓰기가 꺼려져서 휴지통에 버리고, 뜨개질이나 자수를 하다가 모양이 마음에 안 들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다 읽지 못한 책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주 가지 못한 클라이밍 센터에서 연락이 오면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 요 며칠 피아노 연습을 못했는데, 거실에 놓인 피아노를 볼 때면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고 매사에 이러는 건 또 아니다. 내가 관심이 없거나 하기 싫은 일은 곧잘 내려놓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인드이다. 대학 생활이 그랬고, 한때 직장 생활이 그랬고, 그때 내 연애가 그랬지.


나는 왜 이러는 걸까. 이렇게 문장을 쓰고 한참이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나는, 내가 오래도록 잘하고 싶은 일에 부담을 많이 느껴서 그러는 것 같다. 너무나도 잘하고 싶은 마케팅이라는 일, 내 선택과 의지로 꾸린 가정생활,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여러 취미 활동. 그런데 오래도록 잘하고 싶은 일에서 ‘오래도록’보다는 ‘잘 하고’싶은 마음에만 집중하니 부담이 커지고, 그 부담이 독이 되어 ‘오래도록’을 망쳐 버리는 건 아닐까. 혹은 모든 일을 완성해야 하는 결과물로만 여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늘 과정이 괴롭고, 완성하지 못했다며 도망치거나 숨어버리는 건 아닐까.  


‘잘 하고’싶은 마음보다는 ‘오래도록’ 이어나가는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고 싶다. ‘완성’보다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아니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지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작은 것에서부터 연습을 해야겠다. 그리고 내가 오래도록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봐야지. 과정을 즐기고 있는 것도 있는지 찾아보고. 그래서 그것들처럼만 해 나가자고 매일 자신을 다독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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