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그는 담벼락에 나붙은 현수막과 통지서, 경고문 같은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낡고 해져서 분명 오래전에 나붙었을 이것들을 왜 한 번도 보지 못한 걸까. 왜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닥치고 나서야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미리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취기가 오르고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감정들이 뜨겁고 뾰족하게 살아났다. 그건 외부를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자신의 무능함과 미련스러움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묵이 상대의 화를 키우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호석의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듯 호석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갑자기 밖으로 흘러넘친 것뿐이었다. 그는 울분에 휩싸여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호석보다 침묵을 지키는 다른 동료들에게 더 큰 서운함을 느꼈다.
믿음은 하루가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도로는 푸르스름한 새벽의 고요와 적막으로 가득했다. 아침은 그것들을 흐트러트리고 무너뜨리며 천천히 돌진해왔다. 가끔은 아침이 오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침 쪽으로 달려간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부장의 제안을 수락하고 몸을 일으켜 카페 밖으로 나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자신을 지나는 감정이 분노 단 하나뿐이라고 확실할 수 없어서였다. 어떤 순간에도 단 하나의 감정만 존재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는 왜 매번 뜨겁게 솟구쳤던 분노가 넓게 번지고 옅어지면서 연민과 이해 따위의 감정에 다다르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영업이라는 것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뭔가를 판매하려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거이 아니고 그동안 쌓인 시간과 신뢰할 만한 관계라는 것을.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보여준 친절과 호의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때고 조롱과 야유는 쉬운 것이었다. 무엇인가 믿고 기다리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ㅇ과 수고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얼마간 자신을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았다. 저런 사람들이라면 이런 대우가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자 자신의 처지도 별다를 게 없다는 결론으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버려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회사를 혹은 회사에서 보냈던 시간을 그런 식으로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책임감과 소속감, 동질감 같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회사에 대한 그의 마음은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겨우 저런 사람들의 시시껄렁한 대화에 왜 이토록 쉽게 마음이 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지켜왔고, 지키려고 하는 어떤 것들이 훼손되는 것을 더는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입김이 피어났고 그제야 모욕감과 모멸감 따위의 감정들이 선명해졌다. 그러니까 어두운 운전석에 앉아 그가 지켜보는 건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꺼내 보일 수 없는,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내부를 훑고 가는 그런 감정인지도 몰랐다.
그는 종일 들썩이는 감정을 차분하게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종규가 다른 지부로 옮겨 간 뒤에도 몇 해간은 자주 안부를 주고받았다.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고, 만나는 횟수가 줄고, 한번 보자, 만나자 그런 약속이 계속 미뤄지는 동안에도 인생의 어떤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는 믿음과 고마움 같은 것이 그와 종규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종규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썼다. 애쓰지 않으면 생각은 탄성이 붙은 것처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확실할 수 없는 다음 달, 또 다음 달의 상황을 짐작하는 데에 자꾸만 신경이 팔렸다. 그래서 종규를 직접 마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병원이 바로 내다보이는 해장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왔고 그는 허기진 사람처럼 짜고 매운 국물을 떠먹었다. 숟가락질을 멈추면 금방이라도 주워담을 수 없는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대화는 먼 과거에서부터 그들이 앉아 있는 시간 쪽으로 왔다. 속도는 더디고 느려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 주의를 기울였을 때 대화는 종규의 병실 안까지 들어가 있었다. 다시금 붕대를 온몸을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는 종규를 내려다보는 심정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그가 예상할 수 없는 영역으로 완전히 밀려난 것 같았다. 한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하루는 순식간에 지났다. 몇 분이 지났나 하면 서너 시간이 가버리고 일주일이 넘었나 하면 겨우 하루나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고 다만 자신을 관통해나가는 시간을 주시하듯 숨직인 겨울밤의 풍경을 오래 내다보았다.
종규의 죽음은 종규의 책임이 아니고 그를 거기까지 내몬 회사에 있다는 노조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종규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내 힘없고 나약한 피해자로만 살았던 게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내내 끌려 다니고, 결국 죽음까지 내몰린 희생자로만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종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러니까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그러니까 그런 선택을 감행하면서까지 종규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그는 그곳에 서고 나서야 비로소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런 무모한 싸움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에 이처럼 긴 시간과 노력을 쏟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싸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자신이 한 일은 패색이 짙은 이 싸움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다만 지는 것을 미뤄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오래도록 그는 몸으로 오는 이런 고된 피로감을 믿었다. 육체가 단련되고 익숙해지는 동안의 시간을 신뢰했다. 그 시간들이 어떤 일을 비로소 자신의 일로 만들어준다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일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더 인간다워진다는 자부가 있었고, 그 자부 안에 함께 성장해온 회사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깃들어 있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들뜬 기색을 억누르려고 아이가 몹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놀란 듯 지난봄의 달력을 찢어냈고, 다시금 뒤늦게 달력을 찢어내면서 가을을 맞았다. 하루는 무섭도록 길었고 어느 날 돌아보면 한 달, 두 달이 순식간에 지났다.
한수는 정확히 그가 원하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주었다. 노골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고 충고를 두거나 훈수를 두려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자신의 침묵 너머로 한수가 보는 게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서 였다.
조용해서 적막하기까지 한 그곳에서 그는 이런 곳에서의 삶을 잠시 그려보았다. 이곳 사람들의 낮과 밤, 계절에 순응하며 반복되는 그들의 하루를 상상하는 거였다. 감정도, 표정도, 말도 없는 땅 위에서 바람과 온도, 날씨 같은 것들을 마주하는 일상. 그러므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어떤 평화로운 일과. 그렇지만 그들의 삶 속에도 그가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불화들이 존재할 거였다. 갑자기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어떤 가혹한 것들을 그들도 공평하게 껴안고 있을 거였다.
그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쪽으로 맬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그는 다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했다. 일하는 동안에는 자신 내부를 뒤흔드는 어떤 것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에게 일은 이제 뭔가를 지우고 잊기 위해 하는 어떤 것이 된 건지도 몰랐다.
오후의 햇살이 좁은 빌라 내부 깊숙이 밀려들고 있었따. 노부부가 사는 단출한 집 안 내부가 환해졌다. 그는 꼭 필요하다 싶은 물건들로만 채워진 실내를 훑어보았다. 제 주인을 닮은 듯한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며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런 고요와 안정을 얻기까지 장인 내외가 감당했야 했을 어떤 시간들을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체념과 포기에서 비롯된 어쩔 수 없는 승낙이라는 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대화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이어지다가 거칠어졌고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그러면 언성이 높아졌고 하지 않았어도 좋을 말들을 경쟁하듯 내뱉게 됐다. 그때마다 준오는 음악을 크게 틀거나 방문을 소리 나게 닫는 식으로 자신이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알렸다. 한차례 소동이 끝나면 그를 외면하듯 지나치는 준오의 표정 속에서 아이가 품고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하나씩 건져낼 수 있을 것 같았따. 그것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겉으로 보면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도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고 모아둔 돈도 있었다. 지출을 줄이면 어떻게든 생활은 이어나갈 수 있을 거였다. 그러니까 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내일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 대비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 그런 두려움이 아내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였다. 작은 불안의 조짐이 감지되면 그것은 곧장 공포감으로 몸집을 키웠고 거기에 휩쓸려버리는 거였다. 그가 맞서고 있는 것도 실은 실체도 없이 수시로 자신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감정들일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직무가 주어진 지금의 상황이 다행스러웠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무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고,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몹시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차오르는 기대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기국사라는 조그마한 팻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얼마나 더 걸었을지 몰랐다. 트렁크를 끌 때마다 굵은 흙과 자잘한 돌멩이 같은 것들이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