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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쟁이 Jun 27. 2023

[핸드크림]나의 지난 첫 아르바이트

핸드크림을 바르는 습관처럼 일하는 습관만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내 생에 최초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였는데, 나는 그 일을 꽤나 좋아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매달 받는 용돈은 늘 부족했고, 수시로 거짓말로 돈을 더 받아내곤 했는데 이것에 염증이 났다. 일을 하며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도 좋았다. 그전까지 내가 상대하는 어른들은 선생님이 대부분이었는데, 다른 어른들을 상대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니 학생이 아닌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달까.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주유소로 출근하며 직장인의 삶을 미리 살아보는 것도 꽤나 낭만적이었다.


주유소에서 일하면 유니폼과 장갑을 준다. 기름독이 오를 수 있으니 꼭 장갑을 끼라고 첫날에 주임 아저씨가 알려줬다. 철칙인 줄 알고 처음엔 열심히 장갑을 꼈지만 머지않아 나는 주임 아저씨의 말을 어겼다. 기름독이 뭔지도 모르겠거니와 주유할 때는 장갑을 꼈다가 쉴 때는 장갑을 벗는 일이 귀찮았다. 또 맨 손으로 주유기를 잡을 때의 그 차가운 촉감도 좋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 기름독이 잔뜩 올랐다. 주임 아저씨 말이 옳았다. 손에 붉은 반점이 생겼고, 자잘한 칼자국이 가득한 낡은 도마처럼 내 손등은 칼자국 같은 상처로 뒤덮였다. 어느 때는 불이 난 듯이 뜨겁고 따가웠는데 또 어느 순간에는 미치도록 간지러웠다. 무슨 희한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손에 오른 기름독도 좋아했다. 기름독이 마치 일하며 받은 훈장 같았고, 처음으로 일하며 만들어낸 노동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붉은 반점과 상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나서도 계속 남아있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사라지기야 했지만 매년 겨울이면 반점과 상처는 다시 나타났다. 축축한 여름날, 나도 모르게 어느새 피어있는 곰팡이처럼. 내 손등은 언제나 사포처럼 거칠었다.


부지런히 핸드크림을 바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얼굴에도 몸뚱이에도 무얼 바르는 일에 한껏 귀찮음을 느끼는 나지만 손만큼은 달랐다. 손을 씻으면 무조건 핸드크림을 발랐다. 겨울이면 자기 전에 바셀린을 발랐고.


지금 내 손은 말끔하다. 핸드크림을 바르는 습관만 남았고, 기름독의 흔적은 다 사라졌다. 함께 사라진 것은 더 있다. 처음 아르바이트 할 때 느꼈던 것들, 그러니까 돈을 번다는 것과 사람들을 상대하는 즐거움, 또 직장인의 삶에 대한 낭만이나 일하며 생긴 어떤 흔적에 대한 애정이 이제는 없다. 핸드크림을 바르는 습관만 남은 것처럼 이제는 일하는 습관만 남은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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